휴직일기(20) 아빠는 가까워지면 아프고 멀어지면 슬퍼요
매년 새해 카운트다운을 가족과 함께했는데, 올해에는 자취방에서 혼자 맞이했다
1월 3일에 한 친구의 집들이가 있어 친구들에게 줄 파우치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어쩜, 집에서 새해를 맞이했어도 문제 없었을지 모르겠는데.. 그걸 핑계 삼아 난 혼자 있길 택했다
그냥 그런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불안장애라는 진단을 받기 전, 일반심리검사를 받았다
여러 항목 중 하나가 '가족과 무언가를 함께하는 모습'을 그리라는 거였다
다른 그림은 막힘없이 그리다 이 질문에서 나는 펜을 들고 얼마간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했던 모습들을 그리고 싶은데..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모습은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자전거를 타는 남자아이를 나무 밑에서 지켜보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에 대해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다른 가족의 모습이라고 답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내 머릿속에서 가족이란 오로지 엄마였던 것 같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었고,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엄마와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고, 엄마와 학교에서 있던 일에 대해 떠들었다
아빠는 늦게 오거나 화가 나있거나 내가 말을 우물우물하면 답답해하며 짜증을 냈다
아빠가 TV를 볼 때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니까 "TV 소리 안 들리니까 조용히 하라"는 소리를 들었던 걸 여전히 나는 기억한다 (나는 지금도 아빠가 TV를 볼 때 말을 건네지 못한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TV 프로그램이 끝나면 말한다)
이렇게 엄마만이 가족이고, 세상이었어도 나에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렇든 저렇든 엄마는 내 곁에 있었으니까
엄마가 없게 된 후부터, 우리 가족(아빠, 오빠, 나)는 엄마의 부재와 더불어 엄마 없는 소통에 적응해야 한다는 커다란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라는 메신저를 통해 20년간 전달되던 모든 이야기들이 한번에 순탄하게 오고 갈 리는 없었다
술을 마시다가 울면서 주정부리듯 감정을 토해내기도 했고, 어버이날을 핑계 삼아 편지를 써보기도 했다
가끔씩은 마음이 제대로 전해져 고맙다, 수고했다, 힘내라, 사랑한다... 등등의 말들을 듣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음들을 가슴 속에 고이기만 했다
아빠와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야기를 해야 했고, 또 하고 싶었다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기쁘거나 슬퍼서 당장 누구에게라도 말해버리고 싶은 순간들도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나와는 대화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서 언제나 그 결과는 실망이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쿠션 커버를 만들었어요! (신남)
"(사진도 보내주지 않았는데) 디자인을 좀 색다르게 해봐, 하나만 잘 해도 잘 살 수 있어."
"아빠, 이거 내가 낸 아이디어로 완성된 영상이에요! (뿌듯함)"
"성우가 담배 피니? 목소리가 이상한데"
"아빠, 저 머리가 도저히 안 돌아가서 회사를 쉬려고 해요"
"아빠는 어렸을 때 논의할 사람이 없어서 힘들었어"
어렸을 때는 차라리 무서워서 대화할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빠는 내가 A에 대해 이야기하면, A에 대해 길게 설명하거나 A의 단점을 분석하거나 A가 아닌 B에 대해 말했다
A가 어떻게 생긴 건지, 어디서 났는지, 얼마인지,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그것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등등 아빠는 A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둘레를 빙빙 돌다 언제나 다른 길로 갔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참으로 자의적이고도 타의적인 비밀들이 마음 속에 한가득 쌓이게 된 것이다
가끔 너무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자랑하고 싶은 날이 있으면 나는 또 아빠에게 이야기한다
나에게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이러이러한 감정이 들었다고-
그리고 맞이하는 언제나 다르고도 같은 허망한 대답들
속상함을 토로하는 나에게 친구는 그런 건 그냥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지 싶다가도, 그것만이 답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힘이 쭉 빠진다
몇 해 전 친구의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갔던 날, 친구 부모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말로만 들어도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듯한 그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를 한껏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셨다
가끔 그 눈빛이 생각나면, 친구가 아주 많이 부럽고 또 그만큼 내 마음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우리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빠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또 그 이상으로 미안해했으니까.. 그런 아빠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내가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게 엄마의 빈자리인지, 아빠한테 못 받은 사랑자리인지 모르는 텅 빈 구멍이 너무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빈틈으로 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마음들이 전부 새어나갈 때가 있다
나는 아빠가 너무 어렵다
아빠랑 가까워지면 아프고 멀어지면 슬프다
적당한 거리, 딱 그 정도면 괜찮을 관심과 대화, 그런 선을 찾았어야 했던 건 대체 언제였을까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건 아빠라는 막연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빠한테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서 나는 너무 힘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