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 적 꿈은 성악가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노래를 시작해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평생 그렇게 살기를 원했다. 재능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았고, 학교 선생님과 어른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름 시골에서 유명인사였고, ㅇㅇKBS 어린이 합창단, ㅇㅇ시립 소년소녀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1년에 2~3번 큰 공연장에서 정기 무대에 올라보기도 했다.
노래를 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자 유일한 취미였고, 내 인생의 단 하나의 목표이자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겨둬야 했다.
23살, 직장을 오래 다니는 것이 꿈이었다.
적성과 재능과는 상관없이 23살, 돈이 급해 취업을 했다. 계약기간 2년의 비정규직으로 시작한 직장생활. 꼬박꼬박 오랫동안 월급 받는 삶이 꿈이었던 나는 월급이 끊기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정규직이 되고 대리, 과장으로 진급했다. 하는 일은 똑같았지만 연차가 쌓이고 이직을 하니 연봉도 올라갔다.
10여 년간 나의 직무는 비서였다. 비서라는 직무는 나와 맞지 않았지만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직업을 바꾸기엔 매달 내야 되는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기댈 곳 없는 나의 사회적 위치를 유일하게 보여주는 동아줄 같은 직장이었다. 수백 번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 새로운 꿈이 생겼다.
29살, 쇼호스트가 되고 싶었다.
어느 날 아침, 지옥철을 타고 직장에 나가는 것이 공포스러워졌다. 나는 없고 비서라는 탈을 쓴 다른 누군가로 살고 있었다.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생겼고, 팔이 저려 핸드백을 들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다. 수액을 밥 먹듯이 맞고, 통증 경감을 위해 월급의 대부분을 마사지와 경락 치료, 근육주사와 도수치료에 썼다.
29살,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는 동안 퇴사를 결심하고 큰 돈을 투자해 강남에 있는 쇼호스트 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직업을 바꾸는 것 대신 나는 결혼을 선택했고, 30살에 결혼했다. 그렇게 쇼호스트에 대한 꿈은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해 점점 멀어졌고 잊혀갔다.
39세, 홈쇼핑 카메라 앞에 서다.
1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나는 직장인에서 프리랜서 4년, 다시 재취업을 해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잠깐의 프리랜서 기간에 강사로 일했고 강의를 위해 마이크를 드는 것 이외에는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 앞에 서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에게 아주 우연하게 NS 홈쇼핑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소비자 평가원으로 마이크 앞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함께 운동하는 센터에서 알게 된 언니가 내가 강사로 일했고, 팟캐스트 방송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마침 홈쇼핑 담당 작가가 주부 인터뷰 촬영할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고, 오다가다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였던 나를 추천해주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현실이 됐다. 그렇게 나는 꿈에 그리던 홈쇼핑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직무가 비서라는 이유로 나는 조직 내에서 경험해 볼 수 있는 많은 일들에서 제외되었다. 회사 행사를 위한 진행요원을 해보고 싶어도 비서라는 이유로 번번이 불가 통보를 받았고, TF팀에 들어가 다른 팀원들과 섞여 함께 일해 볼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늘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도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했고 나의 시간을 상사와 다른 직원들을 위해 저당 잡혔다. 회사는 나의 장점과 끼,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기 어려운 곳이었고, 비서라는 일은 본래의 나를 억누르는 것이었다.
핀 마이크를 꽂고, 대본을 손에 쥐고 처음 스튜디오에서 녹화하던 날, 나는 진짜 방송인이 된 것 같은 마음으로 내 역할을 멋지게 마무리했다. NG 한번 없이 능숙하게 잘한다며 칭찬도 받았고, 촬영은 초스피드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다시 쇼호트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한참 오래전에 꾸었던, 너무도 원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고 그 기회를 용기있게 잡았다는 뿌듯함이 내 안에 남았다. 잠깐의 일탈이 끝난 후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 다시 돌아와 비슷한 일상 속에 섞여 평범하게 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미 꿈을 이룬 사람들의 SNS를 보고 있으면 우울했다. 꿈을 꾸기 시작한 청소년기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꼬리표에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가보지 못한 길을 늘 갈망하는 사람, 김지현
다른 사람들이 꿈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 걸까 자책하며 살던 날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그 시간동안 나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고,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출산해 건강하고 밝게 잘 키웠고, 나를 이해해주는 배우자를 만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단지 삶을 채워가는 방법과 길이 달랐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꿈을 이룬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일상이 된 그들이 부럽긴 하지만 나는 이미 꿈을 이뤘다.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하고, 한 가정의 멋진 엄마로 잘 살아가고 있으며 다양한 취미생활로 부캐 부자가 되어있다. 아이 두 명을 키우는 대한민국 육아맘이고 넘쳐나는 취미로 재미있게 사는 나를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의 일상에 없는 것이 나의 일상 속에 녹아들어 있다. 나는 나의 삶을 나답게 살아가면 된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동안 나의 경험치를 높여줄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나는 그것을 즐겁고 여유롭게 즐기면 된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야 해보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삶이 이렇게 즐겁고 신나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래서 나의 오늘이 더없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