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인천국제공항~리스본 공항
2024년 11월 6일 수요일 새벽, 밖이 어둑해졌다가 다시 밝아질 무렵이었다.
나는 앞으로 묵을 숙소가 모두 정해지지 않은 관계로 두통을 앓고 있었다. 이것저것 저울질을 하며 최종 여행 루트를 정하는 걸 뒤로 미룬 상태였다. 자세한 내막은 다음과 같다: 포르투갈에 가는 겸에 겸사겸사 스페인도 조금 들렀다 오고 싶었고, 그래서 여행 후반에 잠깐 짬 내어 갈 스페인의 도시를 정해야 했다. 이왕 스페인에 다시 가는 거, 안 가보고 싶은 도시를 여행하고 싶었다가도, 같은 곳을 여행하면 5년 전과는 또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북부, 중부, 남부 별로 숙소비도 천차만별이었고, 어떤 곳은 한국어로 된 정보가 별로 없기도 했다.
한 마디로, 여러 기준과 정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지도 숙소도 정하지 못한 채로 시간만 보내다 기어코 출국 당일 새벽이 온 것이었다. 물론 현지에서 머무를 곳을 정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은 숙소를 미리 정하고 가자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그곳에서 맞닥뜨릴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함이었다. 또, 출국 전에 숙박비를 고정시켜 놔야 여행할 때 남은 예산을 좀 더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다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이번 여행에서 맞이할 스페인의 도시는 서북부 쪽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아 코루냐(라 코루냐)로 정했다. 여행 루트가 정해지니 숙소 예약도 자연스레 마무리되었다. 컴퓨터를 끄기 전에 혹시 몰라 숙소 확정서도 프린터기로 뽑았다. 그리고 이 여정의 막바지에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선 그 어떤 숙소에서도 내 숙소 확정서 출력물을 확인하지 않았다...
머무를 곳 문제를 해결하니 공항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앞으로 있을 3주를 최대한 온전히 즐기기 위하여, 빠진 물건이나 더 거쳐야 할 절차가 없는지 A4 용지에다가 체크리스트를 쭉 작성하고 차근차근 확인했다. 필름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지금껏 열심히 싼 배낭도 두세 번 메어보았다. (아빠가 알려준 대로) 배낭의 아래쪽에는 가벼운 걸, 위쪽에는 자주 쓸만한 물건을, 그리고 등과 맞닿는 쪽에는 무거운 것을 넣어 놓았다. 그리고 출발 아침 당일에 이번 여행을 응원해 준, 그리고 오랜 프로젝트 팀원이 선물해 준 압축팩이 도착했다. 다행히 집에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서, 그것도 배낭에 넣고 갔다.
공항까지는 아빠가 차로 데려다주셨다. 원래는 그냥 지하철 타고 가려고 했는데, 태워준다고 하시기도 했고, 공항까지 대중교통 타고 가면 피곤할 수 있다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얌전히 수긍했다. 차에서는 오만 생각을 다 하다가 잠을 못 이기고 졸았다. 얼마 잠을 자지도 못했는데 눈을 떠보니 창 밖으로 공항이 보였다.
차에서 딱 내렸는데 무서움이란 감정이 확 느껴졌다. '이제부터 정말 혼자구나.'란 마음이 퍼뜩 들었다. (원래도 그러긴 했지만) 지금부터 스스로 택하는 모든 의사결정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리고 만약 무언가 잘못된다 할지언정 그걸 수습하는 것도 나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떨렸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간 공항 내부는 넓고 컸다. 천장은 높았고 뻗어나가는 복도는 광활했다. 그리고 이 공간을 꽤 많은 사람들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처럼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출장 같은 다른 이유로 이곳을 찾은 사람도 있을 테지.' 매끈한 바닥을 다부지게 걸어가며,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막상 배낭을 든 사람이 주위에 없어서, '그냥 나도 캐리어 들고 올 걸 그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시계를 봤다. 출국까지는 세 시간 정도 남았지만, 여유 부리다간 시간이 금세 지나 있을 게 눈에 보였다. 마음을 다잡고, 공항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예전에 캐리어를 들고 여행을 갈 때는 항공사별 데스크에 가서 캐리어를 맡기는 과정을 거쳤다. 근데 나는 이번에 배낭과 작은 가방만 들고 타니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막상 뭘 해야할지 윤곽이 잡히지 않자 빠른 진행을 위해 인터넷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탑승권을 출력했다. 표는 무인 발급기로 재빠르게 발급했다. 위탁수하물로 맡길 짐이 없어서 카운터는 따로 들르지 않았다. 다음 단계인 출발장에 입장하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필름 카메라 후레시용 건전지를 사고 싶었는데 상품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출발장에 들어가서 보안 검색을 받았다. 보안 검색을 할 때 배낭을 몸에서 풀고 올려놓고 다시 매는 과정이 좀 번거로웠지만 나름 재밌었다.
그 다음에는 면세품을 챙기고 밥을 먹었다. 밥은 차돌된장찌개 정식을 먹었다.
식사는 맛이 있으면서 없었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다. 오른쪽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가족이 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한국에 온 걸까, 생각했다.
밥을 다 먹어갈 즈음 시계를 보니 출국까지 한 시간 좀 넘게 남아있었다. 탑승구까지의 거리도 있으니, 식사를 마치고 빠르게 이동했다. 게이트로 가는 길에는 양쪽에 면세점이 있기도 했는데, 걸어가던 도중 키가 큰 어떤 화장품 매장 영업원께서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체험해 보라고 내 손에 덜어주셨다. 킁킁하고 향기를 맡으니 살짝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향수 시향지도 받아서 그것도 맡았다. 향기가 좋았다.
탑승게이트에 도착했다. 출국 전에 기념+인증 사진으로 항공샷을 찍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게이트에서 탑승 안내가 나오고, 나는 사람들이 탑승구를 따라 서 있는 줄로 향했다.
표 검사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러 갔다. 탑승교를 지나 비행기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기체에 들어가기 전에 항공사 측에서 비치해 둔 유선 이어폰 증정품을 하나 들고 갔다. 승무원 님의 자리 안내를 받은 후, 좌석 바로 위 짐칸에 배낭을 올려놓았다.
자리에 앉아서 좌석 구경을 했다. 의자 위에 놓인 담요 비닐도 야무지게 뜯어주고, 물도 마셨다. 그리고 비행기 창문도 구경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제 더 이상 비행기 창문을 열고 닫을 수 없었다. 대신, 하단에 있는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창문 색깔이 자동으로 어두워졌다. 단, 예전에 탔던 비행기에선 특정 시간대(객실 내부가 모두 어두워진 시간)에는 창문을 열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조명도 특정 시간대에는 조정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안내 방송이 나왔다. 비행이 약 15시간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륙 전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그동안 가족과 친구들에게 출발 전 연락을 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15시간 동안 무사히, 그리고 잘 갈 수 있길 바랐다.
왼편 좌석에 앉은 사람이 친절해서 기내식이나 간식을 받을 때 자리가 복도랑 멀어 닿기 어려웠는데, 그럴 때마다 물건을 잘 건네주셨다.
포르투갈어 회화책도 틈틈히 봤다. 몇 주 전에 교보문고에서 샀던 작은 책인데, 포르투갈어 기본 및 상황별 회화를 수록한 도서이다.(내지 디자인이 특히 마음에 들어 산 것도 있다) 숙소를 예약한다든가 특정 상황마다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 나와있긴 했지만, 이걸 말하면 분명 상대방도 포르투갈어로 대답할 거란 말이다. 난 그다음에 오는 말을 알아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책 앞쪽에 있는 간단한 문장 몇 개만 익혀두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해요. 미안해요. 잘 가요.
비행 중반 쯤이었던 것 같은데, 비행기 안에서 다이소에서 산 스마트폰 줄이 사라졌다. 주변을 뒤적였는데 원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머릿속으로 '내 폰을 훔쳐가는 소매치기 예상 장면'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창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이 그새 깜깜해졌다. 비행기 속도가 자전 속도보다 느린 것과 관련 있는 현상일까라고 생각했다.
가면서 영화도 몇 편 봤다.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 그리고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봤다.
어느 순간부터는 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리스본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사람들이 제각기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 역시 그에 발맞추어 짐을 챙겼고, 그 와중에 아까 잃어버렸던 스마트폰 줄도 찾았다. 접착력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발견했다는 거에 안도감을 느꼈다(진짜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이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배낭과 작은 소지품들을 들고 승무원 님과 인사를 나누며 나는 비행기 밖으로 나섰다.
(다음 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