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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Dec 08. 2021

[한국사] 일본까지 전해진 성리학의 큰 스승 퇴계 이황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안동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선비들이 아름다운 풍경에서 공부도 하고 스승을 기리는 제사도 지냈던 서원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곳이 바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입니다. 이 두 서원은 각기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1명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이황입니다. 


이황은 1502년 1월 3일에 태어나 1571년 1월 3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 중에서 문묘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사람은 단 6명뿐입니다. 이언적,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 이황. 이렇게 6명을 6현이라 부릅니다.

문묘종사는 유교의 최고 스승인 공자의 사당에 이름을 같이 올리는 것을 말하고, 종묘 배향은 왕이 승하했을 때 종묘의 신주에 함께 봉안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왕이 보좌에 있을 때 충신이나 공이 큰 사람을 선택합니다. 


1528년 27살 때 부인 허 씨가 둘째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 도중 1개월 만에 사망합니다. 이황은 당시에 장모님이 혼자 계셨는데 외면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대소사를 모두 챙깁니다. 

그리고 이 당시의 관습대로 첩을 두었는데 첩은 이황도 잘 섬기고, 아들에게도 잘해주었다고 합니다. 뒤에 이황은 두 번째 부인을 맞게 되는데 여기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의 할아버지는 연산군 재위 시기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다는 죄목으로 죽고, 할머니는 관노가 되어 버립니다. 사실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그냥 들고 간 것은 단순히 위에서 시켰으니 했을 뿐인데 그것이 죄가 되어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다. 아들인 권질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는 마음으로 연산군을 비방하는 투서를 언문(한글)으로 작성합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거제도에 유배되어버립니다. 이런 집안일들을 겪은 권질의 딸은 충격으로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권질은 첫째 부인을 보내고 첩과 지내고 있는 이황에게 본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주기를 부탁합니다. 심성이 착한 이황은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결혼을 해 권 씨가 두 번째의 부인으로 오게 됩니다. 이황은 두 아들에게도 친모와 계모를 구분하지 말라 미리 당부를 합니다. 


이황의 관직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첫 번째 부인 허 씨가 죽기 1년 전인 1527년에 진사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1528년에 생원시(소과) 급제합니다. 153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합니다. 이후 계속 10년 정도 승진을 계속하다가 1543년 10월에 낙향하고 조정에 복직했다가 낙향하기를 반복합니다. 

이 시기는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사림 세력이 밀려나고 외척 세력이 등장하면서 신흥 외척과 기존에 권력을 잡은 반정 세력의 다툼으로 조정이 시끄러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조정의 관직을 계속 맡고 있으면 어느 한 세력으로 기울어야만 하고, 그렇게 한쪽의 세력에 몸을 기대기에는 부담이 되던 때입니다. 

1543년 이황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얼마 되지 않은 1544년에 중종이 승하합니다. 인종이 즉위하지만 8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 후 다시 명종으로 왕이 바뀝니다. 이때 명종의 나이는 12세.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10년 가까이 수렴청정을 하며 왕권은 바닥에 떨어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이황은 어명으로 조정에 복직한 후 기회를 봐서 다시 낙향하기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1568년에 선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몇 번 벼슬을 내렸으니 계속 거절하다가 1569년에 결국 이조판서가 되어 다시 한양으로 상경합니다. 하지만 계속 병을 핑계로 사직 상소를 올려 낙향 후 1571년 1월 3일(음력 1570년 12월 8일) 사망합니다. 


문정왕후의 10년 섭정이 시기는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사림들이 내실을 다지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서원이 있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기치를 내걸었던 나라이기에 민간 차원에서의 유교 교육도 나름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건국 초기에는 고려 때 절에서 사원(寺院)을 운영하며 교육했던 기능을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세종 때는 이러한 기관들에 대해 상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교육과 제사 모두를 하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았고 조선 중기 정도가 되어서야 자리가 잡히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있습니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시대의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름을 백운동서원이라 부릅니다. 이후에 전국 각자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고, 1550년(명종 5년)에는 백운동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바꿉니다. 현판을 액(額)이라고 하는데 왕이 직접 내려주는 것을 '사액(賜額)'이라고 합니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며, 소수서원을 필두로 황폐해지는 향교를 대신해 나라에서 보조를 받는 서원이 전국 각지체 생기게 됩니다.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게 된 과정에는 이황의 건의가 있었고, 문정왕후의 승인 아래에 명종이 내려준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정계에서 밀려난 사림들이 사원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퇴계 이황 역시 1560년에 도산서당을 짓고 7년 동안 서당에서 생활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합니다. 명종 말에 예조판서가 되었을 때 '무진육조서'와 '성학십도'를 저술하기도 하는데 이를 보면 노년에도 관직에서 권력에 집중하기보다는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는 이황을 '주리 이퇴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기론'과 '주리론' 중에서 이황은 '주리론'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리론과 주기론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조선으로 넘어와서 학자들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은 네 가지 본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착한 본성인 '덕(德)'에서 시작된 감정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에 근본을 둔 이 제 가지의 감정을 '사단(四端)'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중국 고대에서 오래전부터 있던 사상으로서 인간이 외부 사물에 접하면 여러 가지 정이 표현되는 심리 현상을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으로 설명하니 이를 칠정(七情)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고 하는데 주희는 그냥 이런 차이가 있다는 정도만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조선에서는 사단과 칠정의 중요도에 차이를 두어 서로 대립되는 개념처럼 논쟁을 벌입니다. 그 중심에 이황과 기대승, 성혼과 이이가 있습니다. 


먼저 주리론(主理論) 또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理)는 귀한 것이고 기(氣)는 천한 것이라 나눕니다. 배가 물에 다니고 수레가 땅에 다니는 것처럼 임금은 마땅히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공경해야 하고, 부모는 사랑해야 하며, 자식이 효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것을 사단(四端)에 근본을 둔 이(理)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칠정(七情)에 영향을 받는 기(氣)는 불완전하고 인간의 욕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善)인 이(理)가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황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들을 영남학파라고 부르며 대표적인 제자로는 김성일과 류성룡이 있습니다. 이 중 서애 류성용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천거해 선조가 등용하게 힘쓰기도 했고 징비록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류성룡을 모신 서원이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황의 저서를 많이 갖고 넘어가서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또한 근본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며 나중에 위정척사 운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해석이 이황과는 조금 다른 것이 주기론(主氣論) 또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입니다.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순수한 선(善)이자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 이(理),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로 우리의 감각으로 접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 기(氣). 그래서 이는 착하기만 하고, 기는 착할 수도 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서 이과 기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기(氣)는 그릇이고 이(理)는 물과 같아 컵과 대야에 담긴 물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理)는 물과 같이 보편적으로 통하는 것이고 기(氣)는 그릇의 모양이 다른 것처럼 특수성을 가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이유도 이(理) 뿐만 아니라 기(氣)도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시각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어 나중에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에 영향을 끼칩니다. 보통 율곡 이이를 중심에 두며 기호학파라 부르기도 합니다. 


주기론과 주리론의 대표 학자인 이이와 이황은 서로 공감하며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5살의 나이 차이와 성리학의 해석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황은 어린 이이를 훌륭한 학자로 존중해주었고, 이이 역시 이황을 스승에 준하는 태도로 대했다고 하니 역시 위대하신 분들께는 배울 점이 많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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