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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기 Mar 22. 2016

헬싱키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다.

 헬싱키를 다녀온 그 다음날 출근길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과거 프랑스 파리를 여행할 때 우연히 같은 한인 민박집에서 머물면서 친하게 지내게 된 형이다. 그 형과는 여행 후로도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출근길에 우연히 본 것이다. 그래서 반가운 나머지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정시 출근과 지각의 경계에 있을 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또한 출근길 앞만 보고 가는 인파 속에서 나는 홍수에 떠내려 가는 나무토막처럼 어느새 플랫폼 앞에 도달해 있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산다는 것인 이런 것인가?’

  ‘내 의지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레밍즈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마우스 클릭으로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까지 정해진 시간에 가야만 하는가?’ 

나는 그런 상황과 나의 운명이 서글펐다. 그리고 그 순간 여행에서 돌아온지 하루도 되지 않은 헬싱키가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지하철 역에서 모두 같은 모습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회사로 향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레밍즈'라는 게임이 생각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헬싱키를 그리도 그리워하게 만든 것일까? 아마 헬싱키에서 귀국하던 공항에서의 마지막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약 3주간의 여정을 마치고 나는 헬싱키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추억들을 되새기고자 헬싱키에 머물렀던 내내 들었던 영화 '어바웃 타임'의 OST 'How long will I love you'를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는데, 문득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동안 우울했던 내 얼굴에 생기가 돌고 축 처졌던 얼굴의 주름살이 다시 중력을 거스르며 활기를 띄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 가슴에는 따듯한 기운이 올라왔다. 입가에는 미소와 머금어졌고, 눈가에 약간의 눈물이 맺혔다. 오랜만에 자연스럽게 지어진 미소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거부할 수도 없었다. '원래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 기간 내 안에 머물렀던 우울이 말끔히 먼지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가면을 벗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니 '행복......'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몇개의 가면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무거운 가면을 쓰지 않아도 원래의 나로 이 사회에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20대 초반 군대라는 수용소에 들어간 이후 점점 웃음을 잃어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가슴속에 영원히 함께 있을 것만 같았던 피터팬은 점점 아스라이 사라져만 갔고 그 자리에  조금씩 우울감이라는 검은 연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군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된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군생활이 힘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생활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

 “군생활이 즐거운가 보지?” 

몇몇 선임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내 입에 재갈을 물릴 듯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불필요한 갈굼은 피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제 선임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몇 마디 말들을 침 뱉듯이 툭툭 내뱉었다. 그렇게 생각 없이 던져진 말들은 염산이 되어 나의 감정과 표정들을 하나씩 잃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짓는 거야?”

“이 XX가 빠져가지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괴로웠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웃지도 그렇다고 인상을 쓰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군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병장이 이등병을 앉혀놓고 웃긴이야기를 해준다. 멋모르는 이등병은 웃는다. 그리고 병장은 상병을 불러 "저 이등병 XX가 빠졌다."고 한다. 그런 정신나간 병정놀이를 아직도 할까?


 내가 웃음을 잃어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 취업이 되지 않아 사회에서 고립되어 마치 방구석의 벌레처럼 은둔하며 살아가던 시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나는 대학 졸업 후 어렵지 않게 국내에서 제법 큰 규모의 회사에 취업을 했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몇 달의 준비 기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해, 나는 기회 조차 잡을 수 없었다. 나는 크게 낙담을 했다. 그러나 좌절만 할 수 없었다. 당시 결혼을 생각하며 교제하던 여자 친구도 있었고, 그 해가 지나가 버리면 나는 완전히 사회에서 잊힐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함이 내 안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입사 지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전공과 연관이 있고 그런대로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려고 나름 기준을 세워 지원을 했다. 그러나 연이은 낙방 소식에  다급해진 나는 마치 지하철 출구 앞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처럼 아무 회사에나 지원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결국 100군데 넘게 지원서를 내고, 수차례 낙방을 거듭하며 12월 끝자락에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괜찮은 외국계 회사에 겨우 취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당시 마지막 면접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말해보세요?” 면접을 보시던 임원 한 분이 마지막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나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진심으로 말했다.

  “이제 정말, 일을 하고 싶습니다......”

 미리 준비했던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가슴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고 눈시울이 조금씩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너무 감성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해 내 감정을 꾹 꾹 눌렀다. 결말은 취업이라는 해피 엔딩이었지만, 그 과정은 너무 시베리아 벌판처럼 춥고 혹독했다.   


벌래에서 벗어나 나비가 되고 싶었다. 그 과정은 길고 혹독했다. 지금도 나는 다시 회사를 떠나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취업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취업을 하면 웃음을 되찾고 행복한 일들만 계속 내 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실제로 한동안은 참으로 행복했다. 다시 그렇게 원하던 회사 출입증을 목에 걸 수 있었고, 취업 준비를 할 동안 교제해온 여자친구에게 정식으로 결혼 프러포즈를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복과 즐거움이 그렇듯이 그 행복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회사 생활을 하면 할수록 동기부여가 되기보다는 계속 낙담되는 일이 많았다. 회사를 위해 열심을 다했다. 세상에서 잊힐 뻔한 나를 구해준 곳인데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몸이 아파오고 병원에 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이 나도 모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회사의 이기심을 모두 채워주는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그래서 다시 나를 찾고 싶었다. 가족들을 챙기고 싶었다. 계속 '조금만 더 기다려줘' 하며 우선순위에서 밀어내었던 삶의 소중한 것들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는 그런 나의 소망과 실천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노예계약엔 '끝'이 없었다. 나를 찾고, 가족을 찾는 순간부터 나는 관리 대상이 되었다. 작은 것부터 옥죄기 시작하며 다시 원래의 너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회유와 협박을 반복했다. 하지만 회사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을 때의 '나'는 '원래의 나'가 아니기에 '나'는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피터팬을 한 번쯤 꿈꾸지 않을까 한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꿈 말이다. 


 이러한 나에게 헬싱키는 ‘미소’라는 소중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가끔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해 지기 위해 억지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지만, 그렇게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과 함께 눈물이 났던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 있었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동안 타인들 앞에서 가면을 쓴 채 억지웃음만 짓고 살았던 나에게 헬싱키에서의 미소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군대 생활 이후로 처음 지어보는 '원래의 나'다운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나는 미소를 짓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잘 알고 있다. 얼굴의 주름이 축 쳐져 있을 때 그 중력의 무게를 거슬러 오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입은 씩~ 웃고 있지만, 여전히 내 눈은 슬퍼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계속되는 억지웃음은 많은 체력 소모를 가져온다. 그래서 억지웃음을 한참 하고 나면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런 마음이 들면서 말이다. ‘먹고살기 위해 고생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귀국길 헬싱키 공항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지었졌던 ‘미소’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본 일이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지금은 육아휴직을 하며 미소 짓는 날이 많지만 이 행복이 계속 될 수 있을까는 미지수다. 

 나는 이러한 소중한 경험을 글로 남기려고 한다. 그리고 그때의 추억들을 생각으로만 남겨 두어 안개처럼 허공으로 날아 가게 내 버려두는 것이 아닌, 텍스트라는 비닐하우스 안에 가두고 인생의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그곳에 들어가 한 껏 들여 마셔 보고 싶다. 인생이란 롤러코스터와 같아서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계속 반복된다. 아직 짧은 인생을 살아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삶을 돌이켜 보면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었던 같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행이 계속되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했던 순간들을 꺼내어 봄으로써 다시금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기대로 잠시 불행의 순간들을 잊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이러한 기록들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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