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을 서성거린다. 마당가 자작나무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얼굴을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본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 주방으로 가 커피포트에 물을 담는다. 커피 물 끓는 소리를 듣는다.
몇 분 안 되는 순간에 내가 한 행동이다. 누가 했다고? 내가 했다. 정말 내가 그 일을 한 것인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려고 내 손가락, 책상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내 다리, 흔들리는 자작나무 잎사귀를 보는 내 눈,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 소리를 듣는 내 귀. 내가 하고 있는가? 현상은 맞다. 그것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맞는 말이다.
걷기명상 또는 보행명상이란 것이 있다. 걸으며, 움직이며 하는 명상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걸을 때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땅에 닿는 발바닥의 느낌을 관찰하는 명상법이다. 느낌을 자세히 관찰하려면 아주 천천히 걷고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서 있다 걷기를 시작해 보자. 그 순간 발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이 먼저인지 발을 움직이는 동작이 먼저인지를 관찰해 보라. 빨리 걸을 때는 뭐가 먼저인지를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첫발을 떼며 관찰하면 생각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 발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행동에는 생각이 일어난다. 손가락을 움직이겠다는 생각, 다리를 움직이겠다는 생각, 눈으로 잎사귀를 보겠다는 생각, 물 끓는 소리를 듣겠다는 생각 등 의지를 내고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감각하고 느낀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행동들을 제대로 보고 하나하나 알아차리면 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힘이 생긴다. 마음이 쉽게 동요하지도 휩쓸리지 않으며 침착하고 차분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슬기롭게 대처하고 해결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좀 더 생각을 해보자. 내가 걸어갈 때 내 다리를 움직여 걷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인가? 내 생각인가? 내 생각이라면 그 생각을 내가 하는 것일까? 생각을 하는 것이 정말 나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꼬집으면 아프고 눈감으면 안 보이고 하는 그것이 나라고?
그럼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보자. 이름은 땡땡땡이고 나이는 몇 살이고 키는 얼마고 코는 반듯하고 입은 비뚤고 등등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어디서 살고 직업은 뭐고 고향은 어디고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누구랑 결혼했고 어떤 자격증이 있고 하는 것들로도 나를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게 나일까? 내 이름이고 내 나이고 나의 고향이 내가 졸업한 학교, 나의 직업 등등이 나라고? 그게 정말 나일까? 그것이 생각을 하여 내 다리를 움직이게 한다고?
나라고 믿는 그것이 정말 나라면, 내 생각을 바로 그 내가 일으킨다면, 나는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나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싫은 것은 생각나지 않도록 할 수 있어야 내가 하는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 때고 불쑥불쑥 나는 생각들은 없어야 한다.
나와 상관없이 수시로 생각들이 일어나고 떠올리기도 싫은 생각도 계속 생각난다. 그런 걸 보면 내 생각을 만드는 나는 따로 있다.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이름은 뭐고 어디 살고 키는 얼마고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어디 살고 있는 것들로 정리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런 나는 내 생각을 어쩌지 못한다. 단지 나를 나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남에게 나를 소개할 수 있는 특징들만 정리해 놓은 나의 기억의 일부다. 이것을 ‘기억자아’라 한다.
현재 무엇인가 하고 있는 실체를 나로 정리할 수도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문서작업을 하는 나, 아침밥을 먹고 있는 나, 친구 만나러 가는 나는 실시간으로 분명 움직이며 살아있다. 그것이 내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런데 정말 그게 나라면 내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서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생각들을 어쩌지 못한다. 또 그것이 나라면,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는 그것이 나라면, 컴퓨터 작업이 바쁠 때는 손가락을 50개로 만들어 자판을 빨리 두드릴 수 있게도 하고, 작업이 끝나면 손가락을 없앨 수도 있어야 한다. 정말 나라면 내 맘대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에 따라 움직일 뿐 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는 나를 나로 정리한 것을 ‘경험자아’라 한다.
그럼 나의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누가 일으킨단 말인가? 볼 수도 형상화할 수도 없는 그 무엇, 수시로 생각을 일으키고 내 몸을 움직이게 하고 나를 슬프게도 하고 화나게도 하는 그 무엇, 수없는 감정을 일으키는 그 무엇, 그것을 ‘배경자아’라 한다.
볼 수도 설명할 수도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오직 모를 뿐’인 그 무엇이 있다. 종교에서 참나, 진아, 신성 등으로 말하는 어떤 물건이다. 그것이 나의 참모습이고 나의 참주인이다.
'나'라며 철석같이 믿고 사는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 ‘무아’라 한다. 나라고 알고 있는 나는 영원하지도 않다. ‘무상’이라 한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무아이며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면 집착과 욕심을 버릴 수 있다. 내 머리도 팔도 다리도 이름도 다 내가 아니고 다 사라지는 것들인데 집착하고 욕심낼 일이 없다. 그것이 부처의 근본 가르침이다.
없다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하다. ‘공(空)’은 ‘무(無)’와 다른 뜻이다. 공은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으로 꽉 차 있는 상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없지만, 내가 형상할 수도 만질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진짜 나는 있다. 좀 더 들어가면 인간의 실체인 '오온'이 모두 '공'하다. 없는 것이 아니라 공할 뿐이다. 어려운 얘기를 참 쉽게 하고 있다.
진짜 나, ‘참나’를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다.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 '닦는다'라 하는 것은 진짜 나를 볼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의 때를 벗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기도는 마음에 때를 닦는 수행행위다. 그 수행의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불교와 힌두교의 수행법이다. 방법도 많고 체계적으로 제대로 하기도 어렵다. 이것을 서양에서 받아들이며 ‘조용히 생각한다’는 뜻의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란 이름을 붙였다. 좀 더 쉽고 대중적으로 바뀌었다. 이것을 다시 일본에 들어오며 ‘명상(冥想 또는 瞑想)’으로 번역됐다. 기독교에서는 ‘묵상’ ‘숙고’란 말을 쓰는데, 명상과 비슷한 개념이다.
명상은 생각을 없애는 것,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는 것, 마음을 챙겨보는 것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어렵기 때문에 거기에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여러 길들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좌선을 하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한다.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현대로 오면서 명상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종교에서 탈피해 정신과학, 뇌과학, 심리학 등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생각을 집중하는 것, 생각을 없애는 것, 마음을 챙기는 것 등 힘들고 어렵고 무거운 방식에서 최근에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마음 알아차림’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설명한 '내가 없다'는 ‘무아’의 너머에 있는 나, ‘참나’를 찾는 것, 나의 자의식 뒤편에 있는 의식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깨달음의 세계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노력이 이전 글에서 설명한, 뇌의 전전두엽을 활성화하는 최고의 방법이란 사실을 뇌과학, 정신의학에서 꾸준히 얘기하고 있다. 아상을 버리고 무아와 무상함을 알고, 그 너머의 '참나', 자아 뒤에 있는 '배경자아'를 찾아보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