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를 시작하겠다고 저녁 8시면 나가 걷기 시작했다. 주택과 빌라들이 밀집한 우리 동네는 해가 지면 인적이 드물다. 어쩌다 외식을 한 후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는 정도였는데, 늦은 저녁 다양한 경로로 걷다 보니 그냥 지나치던 풍경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많아 수시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거나 휴대폰 메모 앱을 켜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9시가 되어가는 시각, 대형 세탁편의점에서 분주히 일을 하던 비슷한 또래의 여자를 보며 '저녁 있는 삶'이라는 문구가 생각났다. 그이에게는 '운동할 시간이 있는 저녁'이 절실히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옆 건물 돈가스집에서는 아들 또래의 청년이 간이 의자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청소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렴하고 푸짐해 가끔 들러 먹던 콩나물국밥 집이 고깃집으로 바뀐 것도 뒤늦게 알아챘다. 주인이 돈을 벌어 업종을 바꾼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아 마음이 착잡했다. 살을 빼러 나간 길인데 주섬주섬 글감을 모으느라 바빴다.
다들 열심히 사는데 원하는 걸 차곡차곡 얻으며 살고 있을까, 느닷없이 떠오른 부호가 있었다.
플러스(+)를 향해서 가는 삶, 마이너스(-)를 위해 애쓰는 삶.
<더 늘이고, 많이 갖고 싶은 것>
넓은 서재 (=지금보다 넓은 집), 올라타기 쉬운 SUV, 책 책 책. 소재 좋은 옷(캐시미어 같은) 노트북 가방, 고풍스러운 노트. 신박한 필기구, 좋은 인맥. 여행한 나라 목록
<자꾸 늘어나는 것>
옆구리 군살, 밥만 먹으면 대책 없이 부풀어 오르는 뱃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이중삼중이 되는 턱살(아, 그만 쓰자), 책 책 책, 화분, 읽지 않은 책들, 약봉투, 건강보조식품, 높아서 불편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신발, 책상 위 잡동사니, 다시 펼쳐 보지 않는 자료들, 욕심껏 집어 온 공짜 엽서들...
그리고 체중
<자꾸 빠져나가는 것들>
통장 잔액, 몸의 수분, 뼈의 밀도, 알지만 관계가 쌓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들, 읽은 책의 내용들, 기억력...
<늘리고 싶지만 꿈쩍 않는 것들>
책 리뷰, 근육량, 탄력, 마음의 여유, 책 읽을 시간...
정작 내가 빼고 싶은 건 삶의 군더더기
문득 내가 정말 빼고 싶은 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이 들어감의 증거인 살을 어떻게든 덜어내고 싶어서이고, 갱년기 증상으로 나타나는 통증들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규칙적인 운동이라는 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러니 쉰둘이라는 나이의 다이어트는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거나 만족스러운 옷태를 위해서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내가 산책이 아닌 운동으로서의 걷기를 결심한 이유가 있다. '퇴행성 관절염' 증상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심장의 만성 염증을 줄여주는 '땀이 날 정도로 빠르게 걷기'라는 유튜브 영상을봤기 때문이다. 스마트 시계에 심박수 이상 알람이 자주 뜨고, 잠을 자주 깨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관절염 증상이 심해지는 게 심장 염증 때문일 수도 있다니, 무서워라.
50대의 다이어트는 생존의 문제이자 나를 존중하는 행위
날씬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아주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고 자신 없어하는 '운동'이라는 걸 지속적으로 하기는 힘들다. 현재 나에게 다이어트는 '체중을 줄이거나 건강의 증진을 위하여 제한된 식사를 하는 것'이라는 단어 본래의 뜻을 능가하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6월 19일에 시작한 나의 다이어트는 17일째에 접어들었다. 어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벌게진 얼굴이 보기 좋을 리 없지만 기념하고 싶었다.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40대 동생에게 보냈다.
"언니는 오늘도 운동을 했어!"
순간 울컥하며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운동은 이런 거구나. 와, 나는 지금 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 같아!'
인적이 끊긴 골목이 무서워 냅다 뛰어 집으로 향했다.
앞으로도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잦아들고 있는 데다 어제 나의 자존감은 시뻘건 얼굴보다 뜨거웠으니까. 계속 맛보고 싶은 그 희열. 포기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