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완경 탓이라고? 완경 덕도 있다고!

완경 일지 10

by 이화정

50대 언니와 40대 동생은 오늘도 운동 중


언니가 운동 안 빼먹고 잘하는지 체크해주는 40대 동생 덕에 두 달 가까이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나의 운동 역사에 길이 남을 날. 선영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며 좀 뻐기며 문자를 보냈다.

"오늘 수영을 시작했어!"

그리고는 바로 이실직고.

"어리바리한 언니 좀 봐라. 매장 아주머니 말에 혹해서 저 가방을 29,000원에 사다니 ㅋㅋㅋ 오늘 보니 다들 작은 바구니나 간단한 비닐 가방 쓰던데. ㅋㅋㅋ 휴가 때 바다에서 입을 래시가드 사러 갔다가 얼떨결에 수영복까지 샀어. 몇 년 미루고 미루던 수영을 배울 때가 된 거 같아서! 수영복은 매대 있는 걸 골라서 쌌거든? 근데 수영모. 습식 수건. 수경, 가방을 아주머니가 골라주시는 대로 네네, 제가 잘 몰라서요, 하고 넙죽 받아 들고 카드를 드렸는데 18만 원!!!!! 헉!!!!! 난 정말 그렇게 많이 나올 줄 몰랐지."


아주머니는 친절하셨다. 수영 후 샤워하면서 물 빠지게 이렇게 걸어놓고 써라, 샴푸랑 수건 통이랑 이렇게 꽂아서 다녀라, 다들 습식 수건 쓴다, 자세하게 설명을 하며 부지런히 물건들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풀 세팅을 도와준 아주머니께 웃으며 말씀드렸다. 덕분에 제가 바로 등록하러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물놀이해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다음 주 휴가는 바다로 가니 이번에는 꼭 물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수영복이 없어 요즘 많이 입는다는 래시가드를 사러 갔다가 즉흥적으로 수영 등록을 결심했다. 집 근처에 훌륭한 체육 시설이 있는데도 매번 망설였다. 겨울엔 추워서 미루고, 월말에 등록하려고 마음먹지만 수영복이 없어서 미루고.

오십이 넘어서야 처음 레인이 있는 수영장에 들어가 보았다. 신혼여행 때 푸껫의 호텔 야외 수영장 말고는 아이들 데리고 다닌 워터파크가 전부다. 어릴 적 여름이면 동네 개울이나 외가가 있는 가평의 두메산골 계곡에서 살다시피 한 나는 물을 몹시 좋아한다.

8월 수업은 이미 두 번 진행된 상태고 빠질 수밖에 없는 날짜가 두 번이나 있었다. '아까워서 미루고'는 하지 말자, 덜컥 앱을 켜고 등록을 했다. 단번에 이루어진 일인 듯 보이지만 천만에. 그럴 리가.

우지현 그림에세이 <풍덩> 위즈덤하우스

저번 달 읽은 책이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풍덩> 빠져 읽은 우지현의 그림 에세이에는 물속에서 느끼는 청량한 감각들, 물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을 총망라해 놓은 책이었다. 온통 푸르른 색감으로 가득한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이 출렁거리는 듯했다.


처음은 언제나 실수만발


딸을 꼬셨다. 그날은 쉬려고 했던 헬스장에 같이 가자고 한 이유는 처음 가 보는 수영장에서 분명 허둥댈 것을 예감해서다. 엄마의 허당 짓을 수없이 봐 온 딸은 오늘은 처음이니까 일찍 가자고 채근하며 두말없이 엄마를 따라나섰다.

딸은 휴대폰을 달라고 하더니 회원증을 다운로드하여 주고, 탈의실 이용 방법을 알려주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그 사이 벌써 엄마는 탈의실에 맡기려고 가져온 신분증만 담아온 천 지갑이 안 보인다고 가뜩이나 주머니가 많은 수영복 가방을 이리저리 뒤졌고, 그러다 떨어뜨린 수영모를 딸이 주워 엄마 손에 쥐어주었더랬다. 차 열쇠를 대신 맡기고 받은 탈의실 열쇠를 손목에 차는 것까지 본 딸은 헬스장으로 갔다. 그 뒤 나는 또 시트콤 한 편을 찍었다.

탈의실을 가다 말고 혹시 지갑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싶어 노심초사하다가 지하주차장에 가 보았다. 차 열쇠를 맡긴 걸 그새 까먹다니. 안절부절 선팅 된 차창 안을 들여다보는 나! 이쪽저쪽 안절부절 보다가 휴대폰 조명등을 켜고 겨우 조수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지갑을 발견했다. 휴... 다음은 탈의실.

신발은 어디에 넣는 건가 두리번거리다가 입구 쪽 사물함에 넣고, 탈의실 들어가 수영복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이제 수영모 쓰고 수경 쓰는 일만 남았는데, 아뿔싸 수영모가 없다!!!!!!!!!

그때부터 허둥지둥 젖은 수영복 위에 원피스를 입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 딸에게 도움을 청했다. 파란색 리넨 원피스는 이미 엉덩이 쪽이 흥건히 젖어 있고,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딸은 '에구, 우리 엄마를 어떡하냐...' 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엄마처럼 폭풍 잔소리를 하거나 무안을 주지도 않았다. 뭐를 하든 찬찬히, 깔끔하고 야무지게 일을 하는 우리 딸을 내가 반만이라도 닮으면 좋으련만..... 결국 다시 주차장으로. 차 앞에 떨어져 있는 수영모를 겨우 찾았다.

다시 수영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엄마 같은 딸의 곁에 서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뭐든 처음 하는 걸 극히 두려워한다. 뻘쭘하게 서서 도움을 기다리던 기억, 옆 사람이 하는 걸 훔쳐보며 서툴게 따라 하던 모습... 수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물에 들어가자 신이 났다. 혼자서 첨벙첨벙 앉아서 발차기를 했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음파 연습을 구석에서 하면서도 재밌게 했다. 키판을 자꾸 거꾸로 잡아 지적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말 헷갈린다고요...) 물속에 들어가자 어릴 적 물에서 놀던 몸의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맞아, 이런 느낌 너무 좋아했지. 꼬르륵 잠수했을 때 들리는 소리들, 팔과 다리를 감싸는 물의 촉감.

키판을 잡고 네 번을 왕복했다. 허벅지 힘을 쓰고 무릎을 펴고 발차기를 하는 연습. 열심히 했다. 힘들지만 재밌었다. 어릴 적 개헤엄은 잘 쳤던 내가 아닌가. 자꾸 웃음이 났다.


완경이 자랑이 될 줄이야!


"수영 배우는 게 소원 중 하나였는데 오늘 이뤘다."

"부럽!! 저도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생리 때문에 못하고, 비싸서 못하고, 이러저러해서 못하고, 못할 이유가 많은 수영. 수영은 고급 스포츠예요!"

"음하하하 완경자의 여유!"

"개부럽!!!

완경의 장점을 찾아봅시다! 완경과 새로운 시작!"


마침 그날 나는 <완경 선언> 마지막 장을 읽었고, 이 구절에 힘주어 밑줄을 그었던 터였다.


주변의 여러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완경은 반갑지 않은 급격한 체형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처럼 느껴졌다. 호르몬 탓을 하고 싶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다. 바로 그즈음 나는 운동을 그만두고 외식을 더 자주 했었다. 완경기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완경 탓으로 돌리기는 매우 쉽지만 다른 원인으로 인한 증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다시 한번 강조하고 넘어가자. 완경과 관련된 증상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모든 문제를 완경 탓으로 돌리고 에스트로겐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상정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496

제니퍼 건터 <완경 선언> 생각의 힘


나야말로 우울해도 완경 탓, 살이 쪄도 완경 탓, 아프기만 하면 완경 탓을 해오지 않았나 뜨끔했다.

선영과 대화를 하던 중 완경의 자유로움을 맘껏 기뻐하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 맞아. 나는 이제 생리 때문에 수영을 주저할 이유가 없네!!! 만세!!!

완경의 장점을 찾아보자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 또 뭐가 있더라, 딱히 떠오르는 게 아직은 없다. 월경을 하지 않아 편한 점은 있지만 몸이 아픈 증세로 완경을 인지한 터라 완경 대환영, 이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완경의 장점, 완경을 기념해야 하는 이유는 열심히 찾아 기록해 볼 일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당부한 것 중의 하나도 자기 몸에 대해 기록하라는 것. 아픈 증세를 기록해 두고, 먹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이런저런 시도를 한 뒤의 변화를 적어 둔다면 의사와 상담을 할 때도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

나의 완경 일지 또한 완경기를 통과하는 한 여자의 현재 진행형 기록에 의미를 두고 있다. 내 몸에 대한 서사를 기록하는 건 삶의 주체성을 단단히 세워가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완경자의 여유- 언제든 물에 첨벙 뛰어들 수 있는 자유

나는 물속에서 한껏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고 있다. 그림을 보며 꿈틀거렸던 푸르른 욕망.

염소 냄새 풀풀 풍기는 수영장 안에서 나는 열심히 꿈을 키우려 한다. 언젠가 그림 속 여인처럼 우아하고 힘차게 춤을 춰야지.


선영이를 꼬셔야겠다. 지금껏 미루고 미루었던 무언가를 더 이상은 미루지 말라고.

얼마간의 횟수가 쌓인 후에는 미친 척하고 질러보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고. 여전히 돈이 없고,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 미룰 핑계는 얼마든지 많지만 한 번 두 번 유예시킨 우리의 작은 소망들을 더는 외면하지 말자고. 그리고 새로운 소망들을 늘려가자고.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꼭 수영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나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아 시작한 게 틀림없으니 누군가 이 이야기를 읽고 수영 등록을 하게 된다면 나에게는 소중한 동기가 되는 셈. (신호를 기다릴게요)


월수금 저녁 7시. 나는 푸른 꿈속으로 풍덩. 신나는 완경 일지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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