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지 않은 것들의 목록, 그럼에도 용감하게.

완경 일지 12

by 이화정

차, 또 혼나겠네.


헤르페스가 오른쪽 콧속이나 입 가장자리에 번지면 재빨리 몸에게 사과해야 한다. 지금 당장 쉬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몸의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며칠 앓아누울 각오를 해야 한다. 월요일 오후, 일거리를 싸들고 카페에 나가 앉았지만 졸음만 쏟아졌다. 입가가 따끔거리는데 아차 싶었다.

이틀 전 토요일 일정이 만만치 않았다. 일요일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야 마땅했지만 기어코 호수 공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돗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지만 눈이 시원해지는 하늘, 청량한 바람결에 코를 킁킁거리다 이내 벌러덩 누워 눈을 감았다. 지난 한 달이 스쳐 지나갔다.

이랑 책방에서 북 큐레이션 전시를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서울을 비롯 인천, 수원, 구로, 송파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실 때마다 책방으로 달려갔다. 기존 모임에 외부 강의도 여러 개라 유난히 바쁜 한 달을 보냈다. 만나는 분들의 반응이 여느 때보다 뜨거워 고된 여정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여겼다.)


의외의 코로나 후유증


8월 10일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다음날 양양으로 휴가를 가기로 했는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격리에 들어갔다. 하루 세 번 약을 먹기 위해 억지로 세 끼를 챙겨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다. 내가 겪은 코로나 증상은 고열, 오한, 구토, 인후통, 미각상실인데 헤르페스가 양쪽 입가, 코 안쪽까지 가득 퍼져 더 괴로웠다. 인후통은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처음 겪어보는 통증이었다. 9일여 침대에만 누워 있다 보니 감정 조절이 잘 안 되었다. 진공 상태처럼 멍해있을 때가 많았다. 몸이 아픈 것보다 우울감이 견디기 힘들었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인스타그램 피드에 확진 소식을 알렸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따뜻한 글을 남겨 주셨다. 댓글이 달릴 때마다 읽으며 울컥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신 분들도 계셨다. 바쁘다고 피드도 제대로 안 보고, 다른 사람들의 안부도 잘 챙기지 못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떨까 마음을 헤아리며 뒤척이다 잠이 들곤 했다. 영화 두 편을 보고 얇은 책 한 권을 겨우 읽었을 뿐 잠시 기대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뭘 좀 해야지, 그런 생각 자체가 10초도 안 되어 벌써 피로해져서 내내 누워있었다.


그러는 동안 끝없이 후퇴하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관계의 후퇴, 체력 저하, 자신감 상실, 의욕 감소....


괜히 그랬어. 도움이 되길 바라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그 이후로 균열이 생긴 것 같아. 결국 이렇게 마음에 큰 구멍만 남았네. 다시는 함부로 마음을 쏟아붓지 마. 쓸데없는 오지랖은 그만. 다 부질없어.

-수영 강습 겨우 두 번 했는데. 수영장에 다시 들어가긴 글렀어. 이 몸 상태가 회복되려면 이번 달은.... 수강료만 날렸네. 9월엔 물이 차가워서 못 할 거야.

-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네. 비문증이 더 심해졌어. 뭐가 이렇게 많이 날아다니지? 이제는 책도 맘껏 못 읽게 되는 걸까? 무슨 낙으로 살지?

- 50대의 노화란 이런 거구나. 기력이 이렇게 약해질 수도 있다니. 내가 마음먹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겠구나.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거였어. 늙는다는 게 이제 실감이 나네

- 열심히 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고집을 부렸구나. 내가 이렇게도 많이 잘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네. 3년 치 못 잔 잠을 다 잔 거 같아. 잠을 줄이며 일하지는 말자. 제발.

-이제 여행 가기 더 어렵겠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어떻게 예약을 해.


취약성에서 희망 찾기


불확실성, 위험성, 감정의 노출 같은 취약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용기의 근간으로 삼으라는 브레네 브라운의 강의를 들었다. 용기는 중요한 덕목이고 누구든 용감하게 살아나가고 싶을 것이다. 취약성은 나약한 것이기에 감추고 극복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용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7년 전 브레네 브라운의 <마음 가면>을 읽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예전 같지 않은 것들의 목록, 그럼에도 힘찬 반전

-사람에 대한 기대, 관계를 가꾸고자 하는 열망이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날마다 사랑할 준비를 한다.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이 그 순간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여기며 온 마음을 기울이기로 한다.

-추워서 못하고, 돈 없어서 못하고, 수영복이 없어 못하고, 물이 걱정돼서 못하고, 수영장이 멀어 못하고..... 그러다 겨우 큰맘 먹고 시작한 수영을 혹시라도 감기에 걸려 강의에 지장을 줄까 봐 못하고 있다.
예전 같지 않게 자꾸 몸을 사리게 된다. 감기쯤이야 일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을 거라 자신하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현재를 온통 근심 걱정으로 채우는 일은 하지 않겠다. 문제를 피해 갈 궁리만 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려 한다.

- 노화의 증상으로 이미 퇴화되거나 망가진 것들의 목록을 적으라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서글퍼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그동안 애쓴 내 몸을 치하하기로 한다.(몸에게 진짜 잘 보여야 한다.)

- 의지와 열정이 예전 같지 않다. 수시로 의기소침해지는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때가 많아졌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가슴이 뛰다가도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시작을 시작해야 한다. 나를 이끌어주는 훌륭한 선배들이 지켜보고 계시니까.

- 낮잠 한 번 자지 않고 새벽 한두 시까지 일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절감하는 순간이 있다. 이제는 잠깐이라도 쪽잠을 자야 버틸 수 있다. 그래서 즐기기로 했다. 달콤한 낮잠이라 부르며 이왕 자는 거 10분이라도 편하게 누워서.

-여행 계획을 세우다가도 주춤한다. 양가 부모님들의 건강 상태가 진짜 예전 같지 않아서다. 혹시나 멀리 가 있을 때 병원이라도 급히 모시고 가야 하면 어쩌나,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실까 전전긍긍. 한없이 우울해지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감사'라는 단어를 부여잡는다. 두려움이 엄습하면 밝고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드린다. 지금을 놓치면 안 되니까.


글쓰기로 용감하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취약성을 인정하고, 드러내고, 무언가 시도해보며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때로 나약한 모습이 수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약점을 잡힐 수도 있지만 지레 포기하거나 관두지 않기로 한다.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비슷한 사람과 서로 고충을 나누며 '그럼에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겠다. 예전 같지 않은 것 투성이지만 주저앉아 있지 않겠다.

글쓰기는 활자 하나하나에 용기를 다지는 행위다. 취약한 것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나는 용감해지는 것 같다. 디스크 증상으로 쓰는 즐거움도 예전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쓰기로 한다. 이렇게 열심히.


앗차, 헤르페스. 또 자정을 넘기고 한 시가 다 되었다. 미안, 그만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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