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요마 Nov 21. 2023

[에세이]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unsplash.com

'나는 왜 사는가?'


올해만큼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던 한 해는 없던 것 같다. 다시 원래 궤도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마음을 먹을수록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그런 1년이었다. 그리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쌓아온 나의 생활이 작은 균열에도 무너질 수 있음을 실감했고, 여태껏 살아온 방식으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차츰 이해하는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부터 잘못된 걸까? 하는 고민을 가장한 자기비난으로 수개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왜 사는가?'

왜? 왜…? 왜긴 왜야. 살아지니까 사는 거지. 그 말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게는 인생의 목표는 커녕 꿈이나 장래희망도 마땅히 없었다. 그냥 상황에 맞춰서, 가정 형편에 맞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채워왔다. 왜는 없고, '어떻게'로 사는 일을 채워왔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전 회사의 내가 존경하던 부장님이 추천한 책이 문득 떠올랐고, 책장 한편에 사놓고 펴보지도 않았던 그 책들을 찾았다.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 지금 내게 필요한 제목이었다.

알라딘

같이 읽어볼 책,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는 일본의 그림책 작가 사노 요코의 에세이집이다. 60대 중반에 암선고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죽음을 앞두고 부담없이 써내려간 솔직한 이야기. 늙어감에 대해서, 주변에 사는 친구들과의 일상 이야기, 욘사마에 빠져 한국 드라마 정주행하다가 너무 오랜시간 봐 턱이 돌아간 웃픈이야기까지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과거에 대한 미련보다는 오늘의 삶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많이 주는 책들.

그래.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고민하고 복잡하게 사는가 싶었다. 그저 제목만 읽었을 뿐인데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계속 머리에 맴도는 '별일'들이 '별것 아닌 것'이 되는 기분이었다. 죽음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암이 재발하여 시한부 판정을 받은 1938년생 노작가가 쓴 책이었다.

pixabay.com

먹고 사는 일로부터 마음으로


사노 요코는 1938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그의 가족은 다렌으로, 패전 후에는 귀국해서 아버지의 고향으로, 다시 시즈오카, 기요미즈로 옮겨다닌다. 책에는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일본은 패전국이 되고, 중국에는 소련군이 쳐들어오며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수와 보릿겨를 죽으로 끓여먹으며 생존하기 바빴다. 일곱 살부터 그는 집에서는 동생들을 돌보고, 아버지가 만든 짚신을 거리에서 팔았다. 

나는 인간의 온갖 희로애락의 근원을 어린 시절의 생활 중에 체득했다.
그때가 불행의 시대였다고 해도 내가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죽는 게 뭐라고》 中


생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이 시기에 열한 살 오빠와 네 살 남동생을 먼저 하늘로 떠나보낸다. 죽음은 사노 요코와 늘 함께했다. 어쩌면 《사는 게 뭐라고》에 요리하는 장면이나 친구들에게 식사나 차를 대접하는 에피소드가 많은 까닭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그의 마음이 담겨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생존과 직결되어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일상을 소중히 하는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닐 것이다. 

"있잖아, 인생이란 이렇게 하찮은 일이 쌓여가는 것일까?"

《사는 게 뭐라고》 中


사노 요코는 엄청나게 대단한 걸 바라기보다 오늘과 지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지도 않는다. 어느 날은 좋고, 어느 날은 별로인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을 쌓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다만 그에게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설교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아버지의 설교 중엔 이런 말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情'이었겠지.

《죽는 게 뭐라고》 中




알라딘


그의 대표작《100만 번 산 고양이》도 '죽음'과 '마음'에 관한 은유가 나온다. 얼룩 고양이는 100만 번을 죽고 100만 번을 다시 태어난 고양이다. 백만 번 사는 동안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고양이'였고, 그를 돌본 주인들은 그를 위해 울어주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던 고양이가 100만 번째는 도둑고양이로 태어나고, 그는 다른 고양이의 구애에도 홀로 고고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얼룩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100만 번 산 이야기도, 서커스 단에서 배웠던 백덤블링도 하얀 고양이에겐 먹히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네 곁에 있어도 될까?'하는 말을 건네며 사랑을 알아간다. 새끼를 낳고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하얀 고양이가 죽는다. 100만 번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얼룩 고양이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그의 곁에서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말했다.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거라."
그래서 아버지는 가난한 채 쉰 살로 죽었다.
목숨은 지구보다 중하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이라크의 아이의 목숨과 장기이식에 몇억 엔이나 쓰는 사람의 목숨은 같지 않다.
나도 목숨을 아끼고 싶지 않다.
오빠는 열한 살 때, 동생은 네 살 때 이라크 아이들처럼 죽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은 지구보다 무거울지도 모른다.
(…)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사는 게 뭐라고》 中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얼룩 고양이는 죽음에 초연하다. 허나 하얀 고양이를 만나며 사랑을, 남을 위하는 마음을 배우며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성장한다. 이는 사노 요코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정'과 닿아있다. 나만 생각하는 세상이 아닌, 나 아닌 다른 이들을 나의 세계로 품고 나 자신도 기꺼이 그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이야 말로 그에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죽음을 그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 '끝'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맺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그들과 나 사이에 쌓아온 맥락으로 이해한다는 점이 내게는 크게 다가왔다. 그렇기에 '사는 일'은 비단 평범하고, 목표가 없더라도 매일이 소중하다는 말을 그는 태도와 마음,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pixabay.com

나를 좋게 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자존심


두 권의 책에서 사노 요코는 시종일관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죽는 게 뭐라고》의 일본어 원제가 《죽을 의욕 가득》이라니 말 다했다. 그는 2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가장 먼저 재규어 매장에 가서 마지막으로 탈 차를 쿨하게 지른다(?). 사치를 한다거나 갑자기 버킷리스트를 이루겠다고 세계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일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선택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한다.

그가 원체 행복한 사람이어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나는 암보다 우울증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몇 배나 차가웠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점점 없어져갔다.
사람들이 없어지게끔 내가 변하는 것이다. 이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폐인이 되어 몇십 년이고 살아야 하는 걸까. 내심 암에 걸린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입밖으로 꺼내면 몇 안 남은 다정한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말겠지. 내 우울증은 평생 낫지 않는다. 지금도 앓고 있다.

《사는 게 뭐라고》 中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아아, 이런 게 정신병이다.

《사는 게 뭐라고》 中


그는 우울증으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 우울증으로 스스로 호스피스 병동에 찾아가 2주간 있다 나올 정도였다. 두 번의 이혼, 어머니와의 불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시간들까지 그에겐 상처가 많았다. 암은 어쩌면 사노 요코에게 반전의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사는 게 뭐라고》 中


사노 요코는 신경과의사 히라이 다쓰오와의 대담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살아 있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그는 "단지 숨을 쉬기만 하면 좋은 걸까요. 인생의 질이라는 문제도 있잖아요. 무엇보다도 목숨이 소중하다는 건 이상해요."라고 말한다. 죽음을 터부시 하고 편안하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그는 죽음을 직시하려 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내가 죽으면 내 세계도 죽겠지만, 우주가 소멸하는 건 아니니까 소란 피우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끝 이후보다 죽음으로 가는, 내 세계가 존재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나날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그는 호스피스에서 만난 한 여자를 만난다. 남편에게 학대당하며 견뎌온 53년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야기해준 그를 보며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사는 이유는 원망 때문이다. 원망의 뿌리를 잘라내면 이 사람은 살지 못할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그것이 10년 뒤든 2개월 뒤든 원망과 찰싹 붙어 살아갈 것이다.
53년 동안!
이 사람은 강인한 걸까, 나약한 걸까, 아마도 강하거나 약한 차원이 아닌, 마음속 깊이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를 품은 사람일 테지.
내가 아는 건 그녀에게 그런 인생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고, 그녀가 보낸 53년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죽는 게 뭐라고》 中


세상엔 '선택하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많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혹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은 선택도 선택이다. 사노 요코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온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보냈을 테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어린 날 매일 생사의 기로를 건너던 시절부터 일본에서 손에 꼽히는 그림책 작가이자 화가가 된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을 위한 것들로 인생을 채워가려 했다.

살면서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노력해도 채울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성장 환경과 같은 '원점'에서 사노 요코는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것을 가난으로부터 배웠고, 가난뱅이는 가난을 자랑한다는 말을 되뇌지만, '가난해도 좋다. 나는 품격과 긍지를 지닌 채 죽고 싶다.'며 방법은 몰라도 의지를 보인다. 지레 포기하고 체념하기 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선택하고 한 발 나아가며 그는 인생의 마지막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동력은 돈이나 명예보다도 소중한 것, 스스로 자기자신으로 설 수 있게 만드는 자존심이었을 게다.


pixabay.com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스스로 불행에 나를 방치했는가.' 그 누구도 내게 불행해지라고 하지 않았고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나를 무너뜨린 건 결국 나였다. 내게는 엄청난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대신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이루지도 못하는 나 자신을 힐난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인생의 종착역은 내가 사는 동안 얼마나 나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성공하려는 자는 돈이든 권력이든 눈에 보이는 지표들을 더 많이 불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가족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하는 방향으로 살아갈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가장 소중한 것을 선택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괜찮은 선택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내 인생을 대응의 영역으로 빠뜨린 일이었던 것 같다.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쌓으며 나아가는 게 아니라, 한 자리에 서서 남들에게 통제권을 넘기고 피할 것 피하고 맞을 것 맞아가면 버틴 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과정이 행복했다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 자신이 위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는 나를 위해 살고 싶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으면 좋겠지만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나의 기준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100만 번을 살아도 단 한 번의 삶이 소중했던 얼룩 고양이처럼 지금의 삶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내가 나답게 살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이전 12화 [심리]오늘도 미루고 있는, 나를 깨우는 스토리 발굴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