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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Dec 24. 2020

엄마한테는 애 안 맡겨

요즘 즐겨보는 웹툰이 있다. '솔녀' 작가님의 '웰캄투실버라이프'라는 웹툰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일상을 손녀의 시선으로 담아낸 아주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내용이다.

24화 에피소드는 '할머니 엄마'였다. 직장에 다니는 딸을 대신해 손주를 돌봐주는 할머니 이야기다. 아픈 다리로 재빠른 손주를 쫓아다니고 친구들과의 약속을 마음대로 잡지도 못하는 걸 보고 출산 전의 결심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엄마한테는 절대 애 안 맡겨야지.



엄마한테 아이를 맡기지 않겠다는 결심도 엄마한테 아이를 맡길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또 한 번 내 이기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항상 자식부터 생각해주시는 것에 익숙해져서 나조차 부모님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마는 이기심을.


엄마는 나와 동생을 키우는 수십 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을 챙겨주셨고, 손에서 일을 놓으신 적도 없었다.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엄마가 선택할 수 있었던 일은 대부분 몸을 쓰는 일이었고 그 때문인지 환갑 무렵부터는 무릎 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꾸준히 드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게 힘들다거나 지친다는 내색을 하신 적이 없다.

직장을 그만두시라고 해도 기어이 일 년씩, 반년씩 퇴사 시기를 유예하며 자식에게 부담 주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시던 엄마는 마침내 내년 6월, 진짜 퇴사를 하기로 약속하셨다.

이제야 겨우 자신을 돌볼 여유가 생길 엄마에게 내 아이를 맡기고 싶지는 않다.

엄마가 좀 편해졌으면 좋겠다.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엄마는 약 2년간 남의 집 아이를 돌보셨다. 어느 날 엄마가 주방에서 뭘 준비하는 잠깐 사이 아이가 다치고 말았다. 고무공 위에 앉으려다 균형을 잃어 가구에 부딪히는 바람에 머리에서 피가 났다.

남의 집 아이지만 막내아들 돌보듯 애지중지 정을 주며 키우던 엄마는 졸지에 죄인이 되었다. 그날 아이 부모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엄마의 표정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정작 아이 엄마는 괜찮다고, 언제라도 누구와 있었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데도 엄마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몇 년 후 아이 엄마는 둘째를 낳았고 첫째처럼 우리 엄마가 키워주기를 부탁했지만, 엄마는 거절했다.

어쩔 줄 몰라하던 그날 엄마의 표정은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다. 엄마와 함께 있다가 아이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혹시 그런 일이 생길까 봐 엄마가 마음 졸이는 것이 싫다.

엄마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싫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으며 상처 받을 것도 싫다. 엄마에게 책임질 대상은 이제 엄마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


비슷한 이유로 산후조리기간에도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일단 엄마를 끌어들이면 필요할 때마다 찾게 될 것 같았다.

대신 조리원에서 2주를 보냈고 집으로 와서는 3주간 정부지원 산후관리사님의 도움을 받았다. 새벽까지 먹이고 수시로 우는 아이를 달래고 약해진 관절로 씻기는 일이 버거웠지만, 그래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니 혼자서, 아니 남편과 둘이서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한두 달에 한 번쯤 아이와 만나 놀아주신다. 우리가 찾아가는 날이면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잔뜩 준비해두신다. 거기에는 아이에게 먹이기 부담되는 간식들, 시판과자나 설탕 잔뜩 든 음료수, 도 포함되어 있지만 모른 척 넘어가드리는 편이다. 부모님이 주양육자가 아니시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이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 대신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따끔하게 혼낼 때 두 팔 벌려 조건 없이 품어주는 따뜻하고 특별한 사람들로 여겨지면 좋겠다.



아이에게 할머니는 엄마 대신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혼낼 때 조건 없이 품어주는 특별한 사람이면 좋겠다


6개월 후 남편이 복직을 하면 우리도 맞벌이 부부가 된다.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며 아이도 키우는 워킹맘이라고 치켜세워줄 때면 내심 으쓱하기도 했지만, 나도 안다. 진짜는 아직 겪어보지도 않았다는 걸.

출산 후 1년 3개월간 회사를 떠나 아이만 돌봤고, 복직 후에는 남편이 휴직 중이라 업무에 지장이 거의 없었다. 아이가 아파 어린이집에 갈 수 없는 날, 코로나 19 때문에 어린이집이 강제 휴원을 한 날, 부부 모두가 야근을 해야 하는 날의 고충을 나는 머리로만 알뿐이다.

복직 후에는 내가 두 시간 일찍 출근해 정시에 퇴근하고, 남편은 정시에 출근해 야근으로 보충하자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정시출근, 정시퇴근은 꿈꾸기 어려운 직장이라...ㅠ) 하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서 머리로 짜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지는 미지수. 잘 작동하더라도 둘 다 빈틈없이 짜인 시간표 위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면 막막하고 힘이 빠진다.


부모님이 멀리 계셔?



막막한 심정을 토로할 때마다 듣는 사람들의 단골 질문.

부모님 댁까지는 두 시간.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부모에게는 자식이 원하면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거리다. 우리 엄마는 내가 조금이라도 힘든 내색을 하면 이사라도 오실 분이다. 거리가 문제는 아니라고 대답하면 이어지는 질문.

"그럼 하시는 일이 있으신가?"

내 주변 몇몇 사람들이 가진 조부모가 일하는 자식을 대신해 손주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엄마 주변 사람들에게는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엄마가 손주를 돌보지 않는 것을 미안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으면. 자식의 어려움을 부모가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책임과 부담에서 자유로워지셨으면. 그저 가볍게 삶을 즐기시다가 아이가 보고 싶을 때 편하게 찾아오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솔직히 모르겠다. 아직 대책은 없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부모님 도움 없이도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가 있지 않을까. 벤치마킹을 좀 해야겠다. 운이 좋으면 우리 엄마가 그랬듯 남의 아이도 제 자식처럼 돌봐주는 마음 따뜻한 아주머니를 만날 수도 있고.

돌아보면 험하고 복잡해서 지나기 어려운 길은 있어도, 길이 아예 없던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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