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용
밤이 이슥해지는 시간이다. 이런저런 사물들도 어둠 속으로 형태를 감췄다. 밝은 낮 동안 흐드러진 목련도, 찬란한 벚꽃도, 색색의 봄 꽃도 어둠으로 사라졌다. 문득 무용지용을 생각해 본다.
무용지용 : 쓸모없는 것의 쓰임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이다. 미치광이 접여가 공자가 묵고 있는 집 문 앞에서 서성이며 노래를 불렀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그대의 덕이 쇠했는가. 미래는 기약할 수 없고, 지난날은 되잡을 수 없는 것.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루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그냥 살아갈 뿐이다.
지금 세상에선 생을 보전하기만 해도 다행. 복은 깃털보다 가벼운데 잡는 사람이 드물고 화는 땅보다 무거운데 피하는 사람이 없구나.
아서라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위태롭고 위태롭다. 땅에 금 긋고 그 길로만 가는 것은. 가시나무여, 가시나무여 내 갈 길 막지 마라. 물러서고 돌아가려니 내 발을 상하게 하지 마라.
(孔子 適楚 楚狂接輿 遊其門曰 鳳兮鳳兮 何如德之衰也 來世 不可待 往世 不可追也 天下有道 聖人成焉 天下無道 聖人生焉 方今之時 僅免刑焉 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畫地而趨 迷陽 迷陽 無傷吾行 吾行卻曲 無傷吾足)
<장자><인간세>의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광인 접여의 노래는 <논어> 미자 편에 처음 나온다. 미자 편에 이르기를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한 때 초나라에 머물렀는데 접여가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면서 봉황아 어찌 덕이 이토록 쇠했느냐 지나간 행위는 만회할 수 없고 미래의 일은 구할 수 없으리라. 그만두어라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매우 위험하다.라고 노래를 불렀다. 공자가 쫓아가서 그 노래한 사람과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그 사람은 급히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공자는 마침내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楚狂接輿 歌而過孔子曰 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 不可諫來者 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 殆而 孔子下 欲與之言 趨而辟(避)之 不得與之言)
공자를 따르는 유학에서는 천하에 도가 있을 때는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은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접여는 성군이 없던 시대에 애써 쓰임을 얻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공자의 덕이 쇠하여졌다고 풍자하고 있다. <장자>에서 이 이야기는 공자가 쓸모 있는 것의 쓸모(有用之用)는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를 모른다는 우화로 인용한다.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상 만물의 흐름을 한눈에 간파한 장자답게 쓸모없음의 편안함을 말하며 광인 접여를 통해 공자에게 일격을 가한다.
접여는 공자를 봉황이라 칭한다. 봉황이었던 공자가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쓰임을 받기 위해 내세운 것은 과거와 미래이다.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여긴 주나라로 돌아가자고 한다. 옛 성인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규범(사서삼경)을 삼고자 한다. 옛것을 되새기는 과거 지향적 사유는 축적된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 묶여있다. 쓰임을 받기 위한다는 것 자체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과거와 미래를 통해 有用之用에 집중한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시공간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지나간 세월은 잡을 수 없는 것이고 다가올 미래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과거를 부둥켜 앉고 추종하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로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소요유”로서 살아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은거하지 않고(현실을 완전히 도외시하지 않고) 현실에서 살아내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대해 장자는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벌써 쓸모 있다고 본다. 즉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혹은 없는지 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면서 세상을 주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문제 삼는다. 쓰는 자와 쓰이는 자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무엇이 쓸모 있는지 또는 무엇이 쓸모없는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오직 쓸모라는 기준으로 바라보면 자기 자신마저 그 쓸모라는 기준으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여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 쓸모에 맞추고자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장자의 소요유와 제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삶이란 말인가?
우리는 평생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강요받았고 또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쓸모의 요구에 순응해왔다. 그런데 과연 이 쓸모의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누구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돌연 나의 56년이 무용해진다. 나는 평생 이 쓸모의 유령에 사로잡혀 쓸모 있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 온 것이란 말인가? 누가 나를 쓰는지도 모르면서!!
꽃의 속살 군자란!! 저 꽃은 확실하게 나에게 쓸모 있다? 이 또한 나의 지독한 주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