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13)
세계와 세계성
세계는 모든 가용적 존재자가 그 속에서 이미(선행적으로) 밝혀져[1]있는 거기이다. 즉 가용성을 가진 존재자가 가용적으로 되는 그곳이다.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가용적 존재자를 만나게 되고 그것과 교섭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freigeben’(영release=풀어주다. 방출하다. 펼치다.)[2]으로 표현하였는데, 결국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각각의 존재(사물)들이 펼쳐져 있는 공간이 곧 세계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가용적 존재들, 이를테면 ‘도구’들은 반드시 지시에 의해 그 가치가 부여된다. 공간 내부에서 적합한 자리, 적합한 지시로 존재하는 것이 가용적 존재인 것이다. 당연히 전체성[3]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성질을 적소성(適所性=Bewandtnis; 사정 정황)이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적소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적소성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이며, 그 적소성을 근거로 해서 그 존재자는 존재를 확인할 당시 이미 (그 존재가) 밝혀져 있다.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존재자로서 그때마다 적소성을 가지고 있다. 존재자가 어떤 적소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 존재자의 존재의 존재론적 규정이지, 존재자에 대한 존재적 진술이 아니다.[4] 존재자가 어디(Wobei)에 적소성을 갖는다는 것은, 유용성의 '무엇을 위해'(Wozu), 즉 사용 가능성의 '무엇에'(Wofir)이다. 유용성의 '무엇을 위해'는 다시 자신의 적소성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망치질 때문에 우리가 망치라고 부르는 가용적 존재는 망치질에서 적소성을 갖고, 망치질은 고정시키는 데서 그 적소성을 가지며, 이 고정시키는 것은 비바람을 막는 데서 새로운 적소성을 갖는다. 후자는 궁극적으로는 현존재의 안전을 위해, 즉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을 위해 존재한다.”[5]
마지막 부분이 중요하다. 즉 망치▶망치질(망치의 적소성)▶고정(망치질의 적소성)▶비바람 방어(고정의 적소성)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상황은 ‘무엇을 가지고’와 ‘무엇에 쓸 것인가’에 대한 지시가 내재되어 있다. 이를테면 적소성의 궁극 목적은 현존재를 향하고 있는데, 가용적 존재는 현존재에게 그것이 있는 그대로 또 그것이 그렇게 있는 것과 같이 있게 한다는 것이다.(앞서 이야기한 현존재의 개입으로 일어나는 존재적 진술은 아니다.)
위의 예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망치는 현존재에게 망치질을 지시하고 있고 망치질은 고정을 지시하며 고정은 방어를 지시하는 것이 바로 적소성이라는 것이다. 세계란 현존재가 존재 이해(망치의 존재 이해)를 가지고 모든 가용적 존재자(망치)로 하여금 적합하게 쓰일 자리를 미리 지시해 줄 수 있는 바탕, 즉 가용적 존재자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시공간을 말한다.[6]
또한 적소성은 현존재가 가용적 존재자를 만나는 기반으로서의 세계이다. 여기에 개입되는 또 하나의 개념이 ‘함축성’ 혹은 ‘의미성’(Bedeutsamkeit, 영 Significance)이다. 함축성은 현존재가 세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인데 세계 안에 이미 살고 있으면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세계성’이다. 이를테면 주관적으로 적소성과 함축성은 현존재의 삶의 과정을 절차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적소성과 함축성은 세계성의 바탕이며 동시에 현존재를 포함한 존재들의 풍경일 수 있다.[7]
[1] 선행적으로 밝혀져 있다는 의미는 우리의 감각이나 판단으로 파악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2] SZ 11판, 1967. 83쪽 Freigeben: ‘해방하다’. 혹은 ‘열다’의 의미인데 학자들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소광희는 그의 책에서 개현開現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열다’의 의미에 ‘나타내다’의 의미까지 더한 단어로 해석하였다. 『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65쪽
[3] 각 존재들의 상관관계와 위계 혹은 관련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
[4] 존재자의 규정은 각 존재에게 지시된 가용성이며 존재자의 진술은 현존재의 개입으로 판명되는 존재의 가용성이다.
[5] SZ 11판, 1967. 84쪽
[6] 『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71-72쪽
[7] 앞의 책 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