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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Oct 02. 2016

일상성에 대하여(2)

일상으로부터 

1.   일상의 견고함


어떠한 로맨스도 신문 gossip난에 실리는 순간 하나의 치정사건으로 떨어진다는 것, 하여 일상이란 꽃나무 가지처럼 쉽게 흔들리는 듯하지만, 흔들려 상처를 받는 듯하지만, 실은 일상이란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견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흔들리는 듯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심지어 매우 견고한 일상과 그 일상의 이면에 웅크린 그 일상의 그림자들이 만들어내는 석연치 않은 세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또, 일상이란 오래된 수건에 희미하게 남은 선친의 이름(족히 10년은 넘은)처럼 문득 어는 날 발견하게 되는 몹시 사소한 슬픔들을 견디는 것, 하여 위장된 평화와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희망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    나이, 그리고 일상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주관적 감각은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반면, 객관적 감각은 여지없이 둔해지는 것인가 보다. 이를테면 공감각에는 소홀해지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다 그것이 굳어지면 스스로의 틀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모양이다. 


나이가 들면서 변화하는 계절이 너무나 절절하게 다가온다. 거의 주관적 감각에 사로 잡히는 수준이다. 어린 시절에는 나이를 먹으면 계절에 흠뻑 취하지 않으면서 계절을 충분히 느끼고 동시에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절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해내는 능력이 스스로 배양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재 지금 나의 모습은 그 반대에 와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능력은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일종의 책무이자 권리인데 나는 지금 길을 잃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계절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이 너무나 절실하다. 그것들 중 하나가 매일 맞이하는 새벽 시간이다. 새벽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만은, 매일 주어지는 일종의 가벼운 선물이다. 매일 다른 종류로 매일 다른 느낌을 주는 이 고맙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되고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을 자주 느낀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새벽하늘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일 년 중에 새벽을 촬영할 수 있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이다. 여름은 새벽 시간과 아침의 경계가 몹시 희미하여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이를테면 하늘도 구름도 새벽이 가져야 할 깊이와 신비함이 없다. 봄은 안개가 지배한다. 봄 계절의 대부분이 안개이기 때문에 이 계절 역시 새벽 사진 찍기는 사실상 어렵다. 가을과 겨울에도 늘 안개가 문제다. 하지만 안개 없는 깨끗한 가을 새벽과 겨울 새벽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동시에 사진을 찍기에도 그만인 계절이다.

3.    평화를 위장한 불안, 그리고 일상의 매너리즘


매일매일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토록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가끔 놀라곤 한다.  결국 나의 생각에서 ‘나’라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민족과 국가, 이념과 체제라는 엄청난 화두를 머리에 이고(누가 시킨 적도 없는 그 일을) 전전긍긍하던 젊은 시절, 그 거대한 생각의 끝에 언제나 ‘나’라는 주체가 달려 있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즉, 거창한 논리와 위대한 사람의 언명을 들먹이며(잘난 체를 하며) 세상을 이리저리 재단하는 그 순간에도 ‘나’라는 것은 마치 유령처럼 나의 내부 어디 메쯤 아마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나’라는 인식이 분명 해지는 순간, 모든 가치가 돌연 형편없이 찌그러져버리는데 이것을 우리는 흔히 ‘자기중심적’ 혹은 ‘이기적’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한 때 시대정신으로 지칭되었던 여러 사람들이 이 ‘자기중심적’ 혹은 ‘이기적’이라는 절대 강자를 만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좌초시킨 경우를 가끔 본다. 따라서 이타적, 즉 타인을 먼저, 대중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그 순간에도 ‘나’는 항상 그 관계에서 최우선으로 작동되는 機制가 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정이나 사랑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몰아 부치고 난 뒤 거기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우 이기적인 심리적 잔존물일 가능성이 크다. 


비 오는 날 밤, ‘나’라는 것이 지극히 활성화되어 마치 ‘나’ 아닌 모든 것에 어떤 의미도 없는 것처럼 생각이 한 편으로 쏠리는 밤, 간신히 ‘나’로부터 조금 벗어나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아파트 앞에 비닐하우스 위에 떨어지는 수백만 수 천만 혹은 수 억의 빗방울 소리가 ‘나’ 의 의지에 따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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