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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유지

차별 침식

by 김준식

차별 침식


1. 늦게 뜨는 달


달이 조금씩 늦게 뜬다. 만월이 넘은 달은 이튿날 대낮에도 서쪽 하늘에 걸려 있다. 늦게 뜨는 달은 가을 초 저녁을 어둡게 한다. 밤이 어두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도 달이 없는 밤은 달이 없어 어둡다고 생각한다.


그 무엇 인가에 우리는 늘 탓을 하고 스스로는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아마도 밤 10시가 넘어야 달이 떠오를 것이다. 새벽에는 구름이 없기를 빈다. 4시쯤 일어나면 어쩌면 환한 가을 새벽달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묘한 대비와 순환의 세상을 나는, 매일 살고 있다. 그리고 우주의 위대하고 동시에 거대한 질서 속에 나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1411818040_IMG_0341.JPG 하현달, 구글에서 가져옴


2. 현실


현실은 언제나 촘촘하다.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불안정한 태도가 늘 이 촘촘하고 정교한 현실 앞에는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그 무너짐이 인생의 과정이며, 죽음이란 그 과정 중에서 가장 극심한 또는 가장 큰 무너짐일 것이다. 그 순간까지 늘 우리는 이런저런 것으로부터 무너지고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러한 촘촘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도 우리는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 거기에는 욕망과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집착은 스스로의 불안정을 보지 못하게 하고, 촘촘하고 정교한 현실을 제멋대로 해석하게 만든다. 마침내 여지없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을 깨닫는다.



3. 적응


당연한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이 완벽한 오류인데도 우리는 늘 당연함에 몸을 맡기고 있다. 세상에 당연함은 거의 없다. 어쩌면 절대로 없을지도 모른다. 당연함이란 변화 없음이요, 동시에 부패의 시작이다. 언제나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당연히 존재하고, 타인의 사랑과 헌신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가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하여 늘 당연함이라는 마취에 적응하지 않기를 ……. 그리하여 늘 변화에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뿐이다.


4.jpg 구글에서 가져옴

4. 차별 침식


학교 뒤편 강둑 길은, 강 둑과 산의 절개지가 만들어 놓은 길이다. 따라서 산 쪽으로는 높은 벼랑이 있다. 벼랑에는 오랜 세월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또 여러 잡초들이 자리를 잡아 겉으로 보기에는 절개지의 속살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절개지의 단면은 암석의 종류에 따라 차별 침식이 일어나 매우 울퉁불퉁하다. 각기 다양한 성질의 암석과 수천 수 만년의 차이를 두고 각기 다른 시기에 형성된 지층이 오랜 세월 비와 바람에 풍화되어 일어난 차별 침식을 보면서 내 삶을 반추해본다. 내 삶의 절개지에 일어나는 차별 침식에 대하여.


연약한 부분은 이미 많이 패어 속살이 드러났을 것이고 강한 부분은 그나마 그 형태를 유지할 것인데 나라는 존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 두 분이 비교적 균등하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침저녁, 그리고 수시로 일어나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나는 어쩌면 어떤 준비도 없이 침식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균형을 잃고 무너질 것인데, 다만 극심한 차별침식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막연히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피동적이지 않은가?


표지 사진은 비온 다음 나무 등걸에 핀 버섯을 직접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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