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쓸모_Lampshade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시간이 있다. 특별한 일 없이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철 지난 걱정들이 밀려온다. 아무도 해결책을 줄 수 없는, 해결이라는 결론에 다다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미 복잡해진 머릿속엔 엉킨 실타래가 가득 찬다.
아침 일찍. 세수도 하기 전에 코바늘을 잡았다. 거실에 앉아 실 바구니를 옆에 끌어다 둔다. 털실은 겨울을 지나며 작은 타래로 남아 있었다. 방울방울 색색의 털실은 여전히 예쁜 색을 가지고 있지만 왠지 봄과 어울리지 않는다. 털실은 겨울의 색, 겨울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복실 거리는 털실은 이제 창고에 넣어 두어야 할 시간이었다. 겨우내 무엇이든 만들어지고 완성되어 떠난 실들의 자투리었다. 그들은 그렇게 철 지난 털실이 되고 말았다.
계절의 변화는 많은 것을 바꾼다. 어제까지만 해도 매일 걸치던 외투는 전쟁이 끝난 후의 갑옷처럼 무겁고 쓸모가 없다. 사물의 쓸모는 그렇게 계절을 따라 바뀌었다.
머릿속에 엉킨 실타래가 가득한 아침, 뜨개질하기 좋은 시간이다. 머리를 비우려면 손을 움직여야 한다. 마크라메용으로 사다 둔 나무 원형링을 꺼내왔다. 색실을 골라 나무 링 위에 코를 잡아간다. 복잡한 계산이 들어간 디자인이 아니다. 머리가 아닌 손이 하는 디자인이다. 겨울 실을 정리하려다 시작된 이 뜨개질은 남아있는 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창고로 들어 가지 않고 우리 집 거실에 남아 자신의 색을 뽐낼 수 있는 기회말이다. 지름 23cm의 링위에 코바늘 코들이 금세 빙둘러진다. 다양한 색들이 많으니 그림을 그리듯 여러 색들을 섞어서 뜨기 시작했다. 짧게 또는 길게, 손이 원하는 데로 한코 한코 바늘과 실 사이 공기를 가르며 매듭을 지어 간다. 벽돌을 쌓듯 쌓여가는 색들이 즐겁다. 오전을 그렇게 남겨진 털실들과 보냈다. 유독 길고 추웠던 이번 겨울에 대해, 그 상처들에 대해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털실은 시기적절하지 않음에 대한 아쉬움을 잊고 새로운 사물이 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별다른 반항 없이 색들이 쌓여 무언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코를 줄이는 일도 늘리는 일도 계산하지 않았다. 나의 손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코를 만들어 나갔다. 경쾌한 음악에 가볍게 몸을 흔드는 것처럼 약간은 신이 나 있었던 것도 같다.
짧은 뜨기로 시작해 짧은 뜨기로 끝난다. 반복되는 지루한 작업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색의 변주가 있어 빠르게 떠 나갔다. 색이 주는 발랄함을 살려 원통형 갓등보다는 고깔모자 형태의 갓등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전등 키소켓을 주문했다. 2,3일이면 도착할 테니 그동안 갓(lampshade)을 완성하면 된다. 색들이 겹치지 않게, 실의 길이가 너무 비슷하지 않게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했다. 어설프고 삐뚤한 나의 뜨개실력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손힘의 자연스러움과 즉흥적인 아름다움을 짜 넣고 있었다.
손의 감각과 눈대중으로 코를 줄이다 보니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이런 걸 손맛이라고 주장해 본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는 나에게 이 작업은 꽤나 즐거웠다. 코를 줄이는 것도 색의 조합도 내 맘대로다. 어느 한코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달랐을 뿐이다. 세상에 맞추지 않고 나의 손에 맞춰 만들어졌다. 그래서 다시는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3일째 되던 날, 전등 키소켓이 도착했다. 전등 소켓이 들어갈 정도로 코를 줄이고 소켓을 넣고 고깔의 꼭대기를 완성했다. 마무리는 언제나 흥분된다. 전등갓 안쪽 실밥들을 정리하고 소켓에 전등을 끼웠다. 천장에 고리를 하나 달아 두었다. 전등의 높이를 가늠하며 고리에 전선을 걸었다. 콘센트에 전원을 꽂았다.
올 겨울엔 이런 모자를 떠서 쓰고 다녀야겠다. 모자 같은 갓등이나 갓등 같은 모자이거나, 중요한 것은 작업은 즐겁다는 것이다. 손이 움직이면 머리가 맑아진다.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냉장고장에 책장을 넣고 홈카페를 차렸다. 나름 북카페다. 뜨개 조명도 홈카페에 입주했다.
따스한 주광색 전등과 잘 어울린다. 덩달아 홈카페도 따스한 분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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