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없는졸속행정으로 스스로 밥그릇을 걷어찬 씨름협회
1993년 소년장사 백승일이 모래판의 소년 황제로 등극한 가운데 1994년 민속 씨름에 또 다른 걸출한 경쟁자들이 대거 선을 보이게 된다.
1993년 의성고 시절 아마 무대 7관왕에 등극한 후 청구씨름단에 계약금 2억 원을 받고 프로에 데뷔한 이태현 (18세, 196cm, 132kg), 대학시절 김경수(인제대)와 함께 전국대회를 평정하다가 울산대를 중퇴하고 현대에 입단한 신봉민 (20세, 186cm, 140kg), 특유의 유연함을 앞세운 씨름을 구사하고 강호동 은퇴 이후 일양약품의 새로운 간판으로 기대를 모은 진상훈 (21세, 185cm, 130kg) 등이다.
백승일 못지않게 아마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이태현은 공교롭게도 백승일과 같은 팀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당시 청구 씨름단은 신생팀 창단 혜택 및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백승일, 김선창, 이희건, 이태현 등 아마 무대의 최강자들을 독식하다시피 영입하였다. 그러나, 구단의 과도한 선수 욕심은 이후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불미스러운 일로 이어지게 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여기에 정상 복귀를 위해 절치부심 중인 김정필, 정상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어야 했던 박광덕, 꾸준히 정상 무대를 노리는 황대웅 등이 백승일의 아성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1994년 첫 공식 대회인 설날 천하장사 대회에서 백승일의 아성은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하지만 과정은 결코 쉽지는 않았다. 준결승에서 백승일은 민속씨름에 갓 데뷔한 신봉민을 상대로 첫 판을 들배지기로 내주면서 고전하였으나 어렵게 두 판을 연속으로 따내면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 백전노장 황대웅을 만난 백승일은 결승에서도 첫 판을 내주면서 주도권을 내준다. 그러나 기술씨름의 달인답게 2,3,4 번째 판을 내리 잡치기로 따내면서 설날 천하장사에 오른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진리는 예외가 없었다. 1994년 3월 청주에서 개최된 30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신봉민이 민속씨름에 입문한 지 불과 33일 만에 천하장사에 등극하면서 백승일이 세운 종전 기록 (5개월)을 가뿐히 넘어선다.
신봉민은 결승에서 왕좌 복귀를 노리던 김정필을 상대로 자신의 장기인 들배지기 기술을 앞세워 3-0으로 제압하면서 민속씨름 데뷔 첫 공식 천하장사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킨다. 반면 3 연속 천하장사 대해 왕좌를 노리던 백승일은 8강에서 일양약품의 새로운 간판으로 떠오른 신예 진상훈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이변의 희생양이 된다.
전국이 미국 월드컵 대회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6월 전주에서 열린 31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은 모래판에서 가장 핫한 라이벌로 떠오른 백승일과 신봉민의 빅매치가 성사되었다. 백승일은 신봉민을 3-1로 제압하고 천하장사 자리에 다시 복귀한다. 자신의 커리어 세 번째 천하장사에 오른 백승일의 전성기는 최소 5년은 지속될 것 같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그의 씨름 커리어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9월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개최된 32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은 같은 팀 소속인 백승일과 이태현의 맞대결이 펼쳐졌다. 아마에서의 명성과 달리 민속씨름 데뷔 후 단 한 차례도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이태현은 데뷔 후 첫 정상을 노렸고, 백승일은 정상 수성을 위해 두 선수는 한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그 해 4월에 펼쳐진 백두급 결승에서는 백승일이 이태현을 3-1로 제압했으나 5개월 뒤 두 선수는 좀처럼 결판을 내지 못하였다. 처음 세 판을 내리 무승부로 마친 가운데 네 번째 판에서는 백승일이 먼저 따냈으나 다섯 번째 판에서는 이태현이 밀어 치기로 반격하면서 1-1의 팽팽한 승부가 지속되었다.
양 선수는 서로에게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탐색전을 시도하였다. 서로를 너무 잘 알던 나머지 그리고 서로 지지 않겠다는 신념이 워낙 강했던 탓에 탐색전의 양상은 점점 지루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1만여 명의 관중들도 서서히 지쳐갔고 결승전은 무려 1시간 25분이나 소요되도록 승부가 판가름 나지 않았다.
당시 씨름 중계를 주관하던 KBS에서 일반적으로 천하장사 대회 중계에 2시간 30분을 편성하는데 결승전이 좀처럼 끝이 나지 않으면서 중계방송 시간도 정규편성 시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지루한 공방전이 펼쳐졌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민속씨름협회 규정은 천하장사 결승전은 무조건 3판을 이긴 선수가 차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지루한 공방전이 펼쳐지는 것에 대한 제도적인 규제나 촉진룰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두 선수간의 지루한 공방전을 매듭지은 것은 두 선수의 손이나 발이 아닌 저울이었다. 10판이 지나도 승부가 결정되지 않자 민속씨름협회는 경기 현장에서 긴급 이사회를 열어 12판이 지나도 무승부가 될 경우 계체량을 통해 천하장사를 결정한다는 희한한 해법을 내놓은 것이다.
천하장사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전혀 이런 규정을 인지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졸속으로 규칙을 만든 협회의 행정은 무늬만 프로였지 운영은 중구난방, 주먹구구로 일관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하장사 대회는 체중에 관계없이 모든 체급의 선수들이 제한 없이 출전하는 유일한 대회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게가 가벼운 선수가 승리한다는 규정이 만들어진 것은 아예 대회의 본질적인 의미에도 맞지 않는 졸속 그 자체였다.
만약 계체량 규정이 명문화되었다면 체중이 가벼운 금강급, 한라급 선수들은 백두급 선수들과 맞붙어 어떻게 해서든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샅바를 놓고 수비로 일관하게 될 것이다. 그런 장면이 펼쳐질 경우 씨름은 얼마나 재미 없어졌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어질 것이다.
결국 저울로 가려진 32회 천하장사의 가마에는 백승일보다 3kg 가벼운 이태현이 올라타게 되었다. 사상 초유의 결과를 두고 언론에서는 '불명예 천하장사', '쑥스러운 천하장사' 등의 문구로 민속씨름협회의 졸속행정을 맹비난했다. 명승부를 기대했던 사직체육관을 가득 메운 1만여 명의 씨름 팬들도 허무할 수밖에 없었고 모래판에서 굵은 땀을 흘린 백승일과 이태현 모두 씻을 수 없는 상처만 안게 되었다.
백승일은 이 대회 이후 소속팀에서 이태현을 의도적으로 밀어준다고 느낀 나머지 숙소를 이탈하고 잠적하는 등 씨름에 대한 흥미를 놓아버리게 되었다. 이후 재기하기까지 2년 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방황의 시간 동안 백승일의 천재성은 아쉽게도 상당 부분 소멸되고 말았다.
어렵게 민속씨름 데뷔 첫 정상에 등극한 이태현 또한 '저울 장사'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개운하지 못한 정상 등극으로 인해 한동안 정신적으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래판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모처럼 씨름 보는 희열을 마음껏 선사하던 백승일이 모래판에서 모습을 감추면서 모처럼 살아나려던 씨름의 인기도 다시 시들해지게 되었다. 당시 민속씨름협회가 좀 더 체계적인 규정을 확립했다면, 그리고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의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경우 좀 더 현명한 묘수를 내놓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게 된다.
일정 시간 동안 기술을 걸지 않는 선수에게 경고를 부여해서 점수를 잃게 하거나 특정 회차 판까지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을 경우 아예 장사 타이틀을 공석으로 두게 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1994년 9월 저울 장사 탄생의 후폭풍은 여기저기로 퍼졌는데 심지어 주관 방송사인 KBS가 개입했다는 오해로 인해 KBS 스포츠국장까지 해명해야만 했다. 1994년을 마지막으로 1년에 3회 개최되었던 공식 천하장사 대회는 1995년부터 점수제 운영을 통해 1년에 1번 개최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990년대 중반 들어 프로야구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대학팀의 돌풍을 통한 농구대잔치 전성시대가 열리는 등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만한 다양한 스포츠 소재들이 증가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이들 스포츠에 비해 박진감이 떨어졌던 씨름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여기에 떨어지는 관심을 끌기 위한 씨름협회의 마케팅 부재 또한 씨름의 인기 추락을 부채질한다.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의 소재들이 지속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씨름은 정체성마저 잃고 표류하면서 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씨름에 대한 추억도 1994년이 마지막이다. 그 후로는 씨름 중계가 언제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씨름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유일한 민속 스포츠인 씨름의 전성기는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