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걸음
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피곤했다.
'늦게자선가.'라고 여기기엔 12시가 되기 전에 잤으니 엄청 늦은 건 아닌 거 같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일어난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언제나처럼 아이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몰래 태블릿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저래서 눈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건가?
큰 아이의 시력이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중이다. 걱정되는 마음과 달리 태블릿을 숨겨 놓진 않았다.
이미 TV도 없앤 마당에 태블릿까지 치워버리면 섭섭해하지 않을까?
애초에 영상기기를 멀리하고 만지지 못하게 길들였다면(교육시켰다면)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텐데, 이미 잔뜩 고기맛을 본 상태에서 어떻게 고기를 끊으라 하란 말인가.
몸의 균형이 깨질 정도로 고기를 폭식하면 부작용이 생기듯, 정도를 벗어난 태블릿 사용 덕에 아이는 정기적으로 안과에 가서 검진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정기 검진날이다.
'가자 강릉으로!'
고성과 속초에는 대형병원이 없는 관계로 (게다가 소아를 대상으로 한 전문 병원이 없다. 이 부분은 자세히 모르는 관계로 확언을 한 게 마음에 걸린다.) 강릉에 있는 아산병원엘 가야 한다.
서울에서 계속 지냈더라면 이런 수고로움은 모르고 살았을 테지만 지방으로 이사 왔으니 지방의 룰을 따라야 한다. 그래도 강릉에 병원이 있는 게 어딘가. 안 그랬으면 검진받으러 서울로 갔다 왔어야 했을 텐데.
'차로 1시간만 달리면 병원에 닿을 수 있음을 감사하자.'
나도 많이 변했다. 언제는 그토록 인프라 타령을 해대더니. 지금은 인프라가 제공되지 않는 삶에도 제법 적응했다.
검진은 일찍 끝났다.
'이대로 바로 집에 돌아가기는 살짝 아쉬운데.'
"시장이나 들를까?"
"네!"
"좋아요!"
오랜만에 강릉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 가는 날엔 왠지 모를 설렘이 있다.
대형마트에 장 보러 가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른데, 시장이 주는 정취가 있다고 해야 할까.
사본적은 거의 없지만 좌판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고.
군것질 거리가 여기저기서 눈을 사로잡으며.
가성비 좋은 한 끼 식사도 뚝딱 할 수 있는 곳.
별다른 소비를 하지 않더라도 시장에 온 것만으로 여행온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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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점심때인데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정확하게는 사람보다 차가 더 많았다.
"아니 다들 백수인가?"라며 이상 백수가 한마디 거들자 아내가 째려봤다.
눈빛을 보아하니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나 저거 먹고 싶었는데!"
"아... 백수 주제에 먹고 싶은 게 왜 이리 많아?"
자꾸 그러지 마라. 백수 서러워 어디 살겠나.
강릉 중앙시장에 올 때마다 사람들이 줄 서서 사 먹던 닭강정.
이름하여 [배니 닭강정]‼️
이상하게 시장마다 유명한 닭강정집이 있다.
'왜일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지금 시장해 죽겠는데. 맛만 좋으면 되지 뭐. 그래도 이유가 궁금하긴 하네.
"그래라. 하나 사줄게! 까짓 거 내가 청소 좀 더하면 되지 뭐. 안 그래?"
"......"
잠시 동안만 침묵하면 먹어보고 싶던 닭강정을 영접할 수 있으니 이 정도 수모는 참아낼 수 있다. 사실 수모도 아니다. 아내가 없다면 감히 닭강정 맛을 볼 수가 있었겠는가?!
"배고파요 엄마..."
"그래? 뭐 먹을래 우리 아가?"
확실히 내가 아닌 아이에겐 다정다감하다. 이것이 바로 모성애인 것을.
두 번째로 우리가 향한 곳은 가성비 좋은 3,000원 손칼국수집이었다.
-요즘 삼천 원에 파는 음식이 있다고?
소문으로만 들었었는데 강릉 시장 내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가게의 이름은 [이화 국수]와 [성남 칼국수]이다.
라이벌 가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두 곳 모두 손칼국수와 장칼국수를 3,000원에 팔고 있었다.
둘 중에 앉을자리가 있는 곳을 비집고 들어갔다.
내부는 굉장히 밝고 역동적이었다.
잘 삶아진 칼국수 한 그릇에 김치를 올려서 행복하게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여기 칼국수 2개, 잔치국수 1개, 김밥 한 줄 주세요."
막내가 아직 온전히 1인분을 먹지는 못하는 관계로 국수만 4개를 시키기는 양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5분 정도 기다렸는데 바깥엔 어느샌가 늘어난 대기인원이 줄 서 있었다.
"우리 타이밍이 좋았네."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눈빛엔 허기짐이 가득했다.
'빨리 먹고 나와!'라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정면을 볼 수는 없었다.
음식이 나왔다.
"와! 칼국수 엄청 맛있다!"
"많이 먹으렴."
"김밥도 고소해요!"
"그것도 많이 먹으렴."
가성비 좋게 우리 가족은 12,000원의 행복을 누렸다.
"오빠. 그런데 신기하다. 어째서 칼국수보다 잔치국수가 더 비쌀까?"
"그래?"
"어 잔치국수는 4,000원이었어."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간직한 채 가게를 빠져나왔다. 물어보면 해결됐을 텐데, 낯가림이 심하니 다음 기회로 미루자.
"입가심해야 하지 않겠어?"
"또 먹게?!"
"아, 아니... 애들이 디저트 먹고 싶어 할 거 같아서..."
"그냥 본인이 먹고 싶다 해. 뭔데?"
"그게 말이지, 호떡?"
"호오떠억?"
그래도 아내는 천성이 참 착한 사람이다. 남편이 먹고 싶다고 하자 말과는 달리 바로 사주는 게 아닌가.
참고로 내가 강릉 중앙시장에서 좋아하는 호떡집은 [모자호떡]이다.
"어... 오늘은 할머니가 안 계시네."
평소엔 분명 할머니가 열심히 굽고 계셨는데 오늘은 다른 분이 굽고 있었다.
'뭐 맛만 있으면 되지.'
애들용 아이스크림 호떡과 내가 좋아하는 옛날 호떡을 구입 후 특유의 뜨겁고 달콤한 맛을 한껏 누렸다.
'이 맛에 디저트 먹지.'
라며 눈은 어느새 [빵]이라고 쓰여 있는 가게에 꽂혀 있었다.
"자기야! 저, 저기는 꼭 가야 해! 만동제과라고!"
큰 글씨로 쓰인 '빵'을 보자마자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아오. 그만 먹어!"
"헤헤 한 개만 더."
결국 아내는 만동제과에서 베이글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렇게 사 먹으면 칼국수 사 먹은 게 무슨 의미가 있니?"
"원래 먹을 때 몰아서 먹어줘야 하는 법이라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로마트에 들러서 대관령 산 소고기마저 구입 후에야 비로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질 좋은 소고기를 저렴하게 공급해 주니 안 사기가 힘든 곳이다. 참고로 소고기는 아내가 아이 반찬을 만들어주기 위해 구입한 것이니 나의 의사와는 다소 무관하다.)
아이 정기 검진을 핑계로 즐거운 시장 투어를 할 수 있었다.
늘 집에서 붙어 지내는 우리지만, 가끔씩 이렇게 외출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되는 편이다.
"아빠, 저도 비행기 타고 외국 가보고 싶어요."
"어허... 요즘 비행기 사고 뉴스가 많더구나."
"......"
나만 기분전환이 되었던가?
비행기를 타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바람 또한 나중으로 일단 미뤄두고.
내달리듯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켰다.
'뭘 쓰면 좋을까?'
멍하니 손을 끄적이고 있었는데 어느새 글이 쓰여있다.
뭐... 딱히 별다른 내용은 없다.
그냥 강릉 간 김에 시장 들러서 밥 먹은 일상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다.
그래도 무슨 의미라도 있지 않겠어?
그러길 바라며 사온 닭강정이나 한입 먹으러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