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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Apr 28. 2024

동행

페미니스트 아내, 목사 남편, 청년 정치인, 창창의 여행


등장인물

수기 : 여, 62년생 출간작가이자 페미니스트.

더기 : 남, 6(?)년생 목사이자 페미니스트.

범이 : 남, 82년 페미니스트 첫 발자국 뗀 청년 정치인이자 레크리에이션 강사.

창창 : 여, 70년생 페미니스트 두 발자국 뗀 브런치 작가이자 아직은 백수.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는 그때그때 정하는 걸로. Go Go~~



1. 수기와 더기, 서로를 살린 커플


수기더기는 내가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부부이다. 부부의 위기를 기독교 신앙과 페미니즘으로 잘 해결해 왔고 해결해 가고 있는 멋진 이들이다.

그들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우리 부부의 삶도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는데, 내가 이혼하고 나서 그들과 가까워졌으니, 그런 If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그렇다. 그들 부부와 범이, 나는 IF라는 페미니즘 토론 모임에서 만났다. 수기가 리더로 있는 그 모임에 더기는 7년째, 범이와 나는 2년째 동참하고 있다.

흔히 페미니즘, 세월호를 소재로 쓰면 독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나 역시 주춤하곤 했던 소재들인데, 나의 관심사를 말하려면 두 가지가 빠질 수가 없으니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은 만약 불편하다면 여행, 서사 중심으로 읽어주신다면 고맙겠다.   

 

수기와 더기의 현재를 말하려면 과거를 말해야 한다. 결혼 30년 동안 수기는 목사의 아내, 세 남매의 엄마, 사회복지사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섬기며 살았다. 그러다 원치 않은 간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 후 자연치유를 선택한 수기는 자신이 인내하고 살아온 시간이 억울해서 "더 이상의 섬김으로 나를 죽일 수는 없다."라고 울부짖으며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이자 목사인 더기는 아내를 몹시 사랑하고 있어서 아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무조건 따르겠다고 했단다. 그 뒤 두 사람은 올해까지 11년 동안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해 왔다.

세 남매도 엄마를 살리겠다는 한 가지 목표로 페미니즘을 받아였다. 지금은 가족 전체가 페미니즘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그야말로 열린 가족이 되었다.  


수기는 페미니스트로서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말부터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토론 멤버들과 글벗들에게 평어를 쓰자고 제안하였다.

우리 IF 모임의 구성원이 되면 책을 읽고 영화를 본 뒤 평어로 토론에 임한다. 수기의 딸도 우리와 평어로 대화한다.


지식인 집단은 상대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로서 높임말을 쓰는 게 몸에 배었기 때문에 평어를 쓰라고 하면 무척 어려워한다.

혹시 구성원 중에서 높임말을 쓰면 수기가 호통 치며 바로잡는다. 온라인 토론할 때나 단톡방에서나 수기는 절대로 봐주지 않는다. 한 번 넘어가기 시작하면 고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


역시 처음 평어로 말하려 할 땐 어깨가 아플 정도로 쉽지 않았다. 평어가 우리 사이의 장벽을 넘어서게 할 것이라고 믿지만, 나보다 열 살 넘은 선배들에게 평어로 말하려면 낯선 외국어만큼이나 더듬거리고 생각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말이 바뀌니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쉽게 깨지고, 우리의 사고를 유연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 모두 느꼈다.

  


2. 범이 이야기


범이는 7대 종손이라던가. 종손만 알아주는 가부장제 집안에서 대접만 받고 성장해 왔다는 그가 2년 전 수기를 만나 페미니스트로 거듭나는 중이다.

수기가 범이에게 뭐라고 꼬집고 야단쳐도 달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활짤 열린 친구이다.


범이는 페미니즘 공부를 하다 보니 엄마, 아빠와도 더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란다. 그동안 헤어진 연인들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 만나게 될 여성에겐 고생을 덜 시킬 것 같다고 하였다.

"페미니즘이 나와 내 주변을 다 살리고 있는 것 같아."


가장 나이 어린 범수에게 평어 쓰기가 쉬웠겠는가? 범이는 극외향형이라 주변에 친구, 형님, 동생들이 많다. 또 누구에게나 깍듯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그런 그가 스무 살 차이 나는 수기네 부부에게 평어를 쓴다고? 얼마나 어려웠을지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그런 범이와 나도 평어로 대화하는 데 이젠 별 어려움이 없다.



2. 수기와 더기와 범이와 창창의 여행


범이가 작년 여름 강원도 인제의 아침가리 계곡으로 트레킹을 가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개인 사유로 불발되었다.

그래서인가 무창포 가까이에 있다는 친가가 비어 있다며 이번 여행을 제안했다.


여행 전에 군산을 들르자는 이야기는 합의 봤지만 당일에 만날 때까지도 자세한 경로는 물론 준비물도 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우리 중 J는 분명히 있었지만(아마도 더기였을 듯) P 분위기로 가자는 데까지 합의하고 모든 과정은 신나는 수다를 통해 즉흥적으로 치러졌다.


여행 당일 차주인 범이가 "오늘 어디 어디 가 보고 싶어?"라고 물었고 우린 군산 의견을 모은 뒤 달렸다. 군산 시내의 근대사 박물관과 골목을 걷고 선유도로 달려 대장도의 대장봉을 올랐다. 유명하다는 씨앗 호떡도 먹으며 느긋하게, 느긋하게 다녔다.


어두워질 무렵에는 무창포 해변으로 가서 일몰을 보기로 하였다. 저녁 일곱 시에 닿아서 십 분 동안 기다렸다가 해가 수평선 너머로 스러지는 장대한 장면을 포착하였다.


대장도에서 바라본 선유도. 무창포의 일몰.


예상치 못했는데 커다란 달이 떠올라 한동안 바라보았다. / 범이네 앞마당 감나무. 올 가을이 기대된다.
수기와 더기의 채식 습관 덕분에 건강식단으로 꾸며진 저녁 식사./ 털을 쓸어주지 못한 냥이들이 눈에 선하다.




우리 네 명은 페미니즘으로 이어진 친구들이다.

수기와 더기가 페미니즘 토론 모임을 함께해 왔고, 수기는 나와 글쓰기 모임 글벗으로 만났으며, 수기를 따라 내가 세월호 유가족 만남과 독서 토론 연대 활동에 동참하였다.


수기는 세월호 집회에서 청년 정치인 범이를 만났, 범이는 수기에게서 페미니즘을 가르쳐 달라 하였다. 

우리는 작년 초부터 페미니즘 토론 모임에서 매월 책과 영화로 페미니즘 토론을 해 오고 있다.

군산에서 무창포, 개심사로 이어지는 1박 2일 동안 농담을 넘나들며 수다를 떨었다. 이틀 동안 수기는 우리가 부르는 노랫말과 무대 영상 등에서 '기다리는 여자, 우는 여자, 자책하는 여자'라는 고정관념을 찾아냈다. 무심코 불렀던 노래들에 당대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담겨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최근에 다큐 영화 <어른 김장하>를 보고 여러 사람에게 추천했다고 하니 수기와 더기, 범이도 마침 다 시청하여서 풍성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기가 하는 말.

"훌륭하시지. 근데 그분이 세끼 밥을 자택에서 드셨다는데, 한때 열다섯 명이 넘는 한약방 직원들의 밥을 다 해 주신 분이 계시잖아. 아내분 말야. 아내분의 피땀눈물을 먹고 그 한약방이 성장했다는 걸 보면 한 남성이 이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분을 위해 헌신하는 주위 분들도 계시다는 걸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해."


대장봉까지 이어진 수많은 계단을 낙오자 없이 올랐으며, 선유도 해변에서는 맨발로 걸으며 곧 다가올 여름을 조금 실감했다.


범이네 시골집으로 들어가서 채식으로 꾸며진 저녁 밥상을 차려 마당에서 먹은 뒤 도시의 별들보다 빛나는 별들을 보았다. (사진에 담기진 않았으나.)

한산 소곡주를 마시고 달달해진 수기가 생활 속 페미니즘을 열강 하는 가운데, 나는 냥이들과 거리를 좁혀볼까 기대를 품으며 일방향의 애정 구애를 했지만 실패하였다.


흥꾼 범이가 오가는 차 안에서 디제이를 자처하여 우리의 신청곡을 골고루 찾아내 들려주었는데 시골집에도 노래방 기구가 갖춰져 있어서 새벽 한 시까지 노래를 불렀다. 주변에 아무 집도 없어서 목청껏 불러대도 아무 부담이 없는 완벽한 노래방이었다.


수기한테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수 차례 들은 나는 특히 신이 났다. 이혼한 뒤 혼코노(혼자 코인 노래방)를 다니며 갈고닦은 보람이 있었달까. 실은 내가 전 연령대 노래를 꽤 많이 알고 있던 덕분이었다.


수기는 어린 시절부터 지긋지긋하게 집안일을 해 왔다면서도 나물 뜯는 즐거움은 버릴 수 없다며 상추, 머위, 미나리, 돌나물들을 뜯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제일 먼저 일어나 맨발로 잔디를 걷다가 캠핑 의자에 앉아 온몸으로 햇살을 받았다.

우린 아무 데도 움직이지 말자고 합의하고, 오전 11시까지 뜨락의 햇볕과 바람을 즐기며 못다 한 수다를 떨었다.

나물 뜯는 재미를 잘 모르는 나는 오롯한 베짱이였다.


대장봉에서. 견생샷 찍어주러 온 젊은 커플과 상호 찍어주었음. / 노래방. 나훈아부터 아이유까지.
미나리 뜯는 수기와 베짱이 놀이 창창. / 수기의 부지런함 덕분에 나물범벅밥 먹다.
더기가 보내온 카톡. 기쁨 주고 행복 받은 카톡. / 집에 돌아와 생전 처음 무치고 끓인 미나리와 쑥국.




* 이튿날 개심사~안산 과정은 생략하고, 아래 각자 나눈 소회들로 마무리한다.

더기 : 목사인 나와 누가 평어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눠주겠어. 이번 여행은 죽마고우들과의 여행처럼 편안했어. 고마워.

수기 : 남편을 끼어줘서 고마워. 나이와 성별을 초월하여 수평 관계로 다닌 여행이라 정말 즐거웠어.

범이 : 더기와 수기, 창창이 나이를 의식할 수 없게 동행해 줘서 나야말로 제일 큰 수혜자야. 앞으로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고 실천하고 싶어. 아직 형님들에겐 어떻게 전파해야 할지 과제가 남아 있지만.

창창 : 너무나 다른 조건의 네 사람이 처음 동행한 건데 갈등 없이 시종 웃을 수 있는 여행일까. 아침가리 계곡이 기대돼. 8월에 꼭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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