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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l 29. 2022

잔치국수 - 소박한 잔치 한 끼

파티와 잔치는 다르다. 시끌벅적한 사교 난장은 매한가지지만, 파스타보다야 잔치국수가 인간적이다. 파스타는 같은 국수면서 양도 아쉽고, 추리닝도 불허하고, 가격이 오만하다. 돌잔치, 칠순잔치는 시들어가고 파티룸이 세를 넓히는 세상에서 잔치국수는 잔치의 흔적기관으로 남아 쩨쩨하고 불손한 오만함에 맞선다. - 편하게 와라, 괜찮다. 와서 배 터지게 먹어라.


뷔페의 사리 한 줌짜리 잔치국수를 먹을 일이 없어졌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해도, 환갑이 노인이 아닌 시대에 잔칫날의 장수 기원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퍼진 면을 싫어해서 미리 삶아둔 사리는 어지간하면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해도, 참석해야 할 결혼식들을 졸업하고 보니 국수사리는 쌓여 있는 것만으로 배경음악처럼 후루룩 후루룩 제 몫을 다하는 듯했다. 대접하는 쪽에서도 준비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잔치국수도 못 만드는 식당은 장사를 접어야 한다. 면에 육수를 붓고 고명을 올리는 게 전부인 음식이다. 육수는 손맛이라기보다는 음식 장사하는 사람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성실성이다. 어차피 양념장으로 간을 맞추기 때문에 멸치 비린내만 잡아내면 충분하다. 잔치국수는 잔치국수의 사전적 의미를 대충 구현할 정도면 이름값을 다했다. 그게 중요했다, 대충. 잔치국수는 성의가 담겨있되 만만한 한 끼다.


김치만 있으면 고명은 없어도 상관없지만, 역시 있는 게 더 낫다. 계란 고명은 영양학적 필요를 떠나 면 사이를 폭신폭신 완충했고, 그 사이에서 부추는 씹는 맛을 더했고, 오이는 머금고 있던 수분을 터뜨리며 청량감을 퍼뜨렸다. 최근에는 잘게 썬 단무지를 고명으로 쓴 잔치국수도 먹어 봤는데, 담백한 국물에 단무지의 아삭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반짝반짝했다. 김 고명은 늘 의문이었다. 눅눅해진 김은 먹지 않으면서 아예 국물에 적셔 먹는 모순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국물을 얼룩지게 만들어 국수 미관을 해쳤고, 젖은 김의 느물느물한 식감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고 김이 무슨 맛을 내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에 끼어 민망해질 때가 있지만, 빠지면 섭섭했다.



잔치국수는 국물 음식 중에 인간 체온에 가장 가깝다. 한식에서 국물음식은 보글보글, 지글지글을 뚝배기에 담아내어, 먹는 사람의 배 밑바닥에서부터 ‘으허!’를 끓어 올리는 사명을 띤 것처럼 한 성깔들 하지만 잔치국수에는 그런 필사적인 열정이 없다. 음식을 받은 처음부터 조심성 없이 벌컥벌컥 들이켜도 된다. 냉국수마저 다른 차가운 음식에 비하면 냉기가 순했다. 냉면이나 물회는 까슬까슬한 살얼음을 품으며 냉기가 사나웠지만, 냉국수는 각 얼음이 떠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국물이 액상을 유지했다. 국물이 뒷골 당길 만큼 난폭하지 않아서 시원함을 몸속으로 거침없이 들이킬 수 있었다. 온국수든 냉국수든 실제로 나는 거의 마시듯 먹어 국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보다 먹는 시간이 짧았다.


무엇보다도 쌌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중국집 미끼 상품이 되어버린 짜장면을 제외하면 잔치국수보다 싼 점심 한 끼를 모르겠다. 런치플레이션의 시대, 잔치국수도 몸값이 올랐지만 10,000원에 닿으려면 멀었다. 내 생활권에는 아직 5,000원짜리 국숫집이 흔하다. 저렴한 가격에도 들어가는 식재료와 회전율을 생각하면 수익은 나쁘지 않을 듯하니 주인과 손님이 상부상조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다.


대부분의 밀가루 음식이 배가 빨리 꺼지듯, 잔치국수도 든든함이 오래 가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잔치국수의 선택 기준은 양이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먹어야 끼니의 체면을 유지했다. 프렌차이즈 국숫집은 양도 표준화 되어 있었고, 정갈한 인테리어의 국숫집은 양도 정갈하므로 잔치국수가 먹고 싶을 때는 우선 배제했다. 적당히 허름하고 ‘아줌마’가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 곳이 양이 넉넉했다. 위생상태가 미덥지 못해도 어차피 일주일에 설거지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내 부엌보다는 사정이 나을 테니 가스렌지 주변 불때와 천장 찌든 기름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평균적인 맛을 내면서 겉보기에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사리가 푸짐하면 충분했다. 탄수화물 폭탄을 몸속에 때려 붓는 셈이지만, 탄수화물 덩어리 중에 잔치국수만큼 깔끔한 음식도 없으니 기꺼이 눈감아 준다.


끼니로 잔치국수를 먹었을 때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잔치국수에 대한 눈높이 자체가 낮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맛있어 봐야 잔치국수라는 저렴한 기대치가 가게마다의 차이를 무마하며 만족도를 높였다. 잔치국수는 그냥 잔치국수다. 이 말은 잔치국수의 독립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짜장면과 단무지는 한 몸이고, 라면과 김치도 거의 친족관계고, 설렁탕 맛이 상향평준화 되면서 깍두기가 가게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하지만, 잔치국수는 상대적으로 밑반찬의 영향을 덜 받았다. 여차하면 김치로 고명을 퉁치듯, 밑반찬은 고명으로 그럭저럭 퉁쳐졌다. 국수 한 흡입, 국물 한 모금이면 됐다.



3,000원 정도만 더 쓰면 약간의 석쇠불고기를 내주는 가게도 있다. 산더미로 쌓인 국수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돼지국밥 안에 들어간 실질 고기 양을 생각하면 합리적이었다. 실제로 먹어 보면 국수는 흡입 단위로 먹고, 고기는 한두 점 단위로 먹으니 국수-고기-김치/고추의 순환 리듬을 굴리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궁합은 입 안에서 대체로 옳았다.


집에서 해 먹을 만한 음식인지는 모르겠다. 물이 끓어오를 때마다 물 반 컵씩 부어주기 두 번이면 면은 쫄깃쫄깃하게 삶겼다. 그러나 육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의외로 다양한 재료가 필요했다. 멸치육수라고 해서 멸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1인 가구가 다양한 식재료를 조금씩 비축해두는 것은 애초에 무리여서 집에서 잔치국수를 해먹는 것은 포기했다. 역시, 잔치 음식인 것이다.


무난한 끼니의 왕이 있다면 잔치국수를 꼽을 것이다. 잔치국수는 주머니사정과 촉박한 시간에 쫓겨서 먹는 끼니의 땜질이 아니다. 무난함 중에서도 무난한, 그래서 끼니로서의 존재감이 적고, 적극적인 식욕을 유발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한번 잔치국수를 떠올려 보면 꽤 괜찮은 선택지가 된다. 잔치국수 같은 저렴한 글을 이왕 여기까지 읽은 당신, 지금 당신은 잔치국수가 먹고 싶다.


출퇴근길에 있던 ‘진달래 분식’은 가장 저렴한 가격에 배가 찢어질 만큼 퍼주다가 문을 닫았다. 집 인근에 있는 ‘김밥사랑’은 5,500원이지만 양은 든든했다. 도서관 가는 길에 있는 ‘할매 국수’는 맛이 가장 깔끔했고, 공부방 근처에 있는 ‘남해멸치국수’는 불고기와 세트메뉴 8,000원이었다. 이 기름기 없는 식당 이름들처럼 그냥 ‘엄마, 밥!’하듯이, 당신은 소박한 잔치 한 그릇이 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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