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와 피자헛이 우리나라에서 세를 확장하던 시절, 미국은 금발의 천사와 근육질의 전사들이 세련된 정장을 입고 행복을 나누는 낙원이었다. 한 손엔 커피, 다른 손엔 신문이나 샌드위치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뉴요커’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 선망들이 모여 훗날에서야 ‘뉴요커’가 대중화 되었으니 순차관계는 바뀌어야 하지만) 정크푸드의 속사정은 푸른 잔디로 가꿔진 마당 위에서 내 덩치만 한 개와 함께 하는 바비큐 파티의 후광에 가려졌다. 가장 미국적인 것이 가장 천국적이었다.
88년 조용필은 ‘서울서울서울’을, 92년 신해철은 ‘도시인’을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는 아침이야말로 도시인의 정석이었다. 자유의 여신상도 아침에는 시리얼에 우유를 먹을 것 같았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진위 여부는 상관없었다. 나는 흰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고, 우유를 마시면 자주 설사를 했고, 시리얼 맛을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상대는 미국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맛없는 걸 먹을 리 없었다. 시리얼은 바쁜 현대인의 아침을 책임지는 가장 품위 있는 가정식이었다. 현대, 지금은 촌스럽게 들리지만 당시는 현대를 따라 잡고 있는 입장이어서 미래지향적이고 세련된 정식 기치였다.
시리얼은 과자였다. 역시 미국, 과자로 식사를 하는 첨단의 나라였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식사는 촌스러웠다. 밥보다 과자를 좋아할 나이였다. 밥-국-김치 삼위일체에 잔반이 추가되는 형식에서는 음메, 소 울음소리라도 날 것 같았다. 사람들의 젓가락이 분주하게 교차되며 맵고 짠 냄새가 공유되는 밥상에 비하면, 각자의 시리얼을 각자의 우유만큼 먹는 모습은 그야말로 21세기였다.
내가 처음 먹은 시리얼은 ‘죠리퐁’이었다. 죠리퐁은 시리얼이 아니지만, 100원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유사 시리얼이었다. 튀겨낸 밀쌀에 당액을 입힌 과자이므로 제조 방식은 달라도 아무튼 곡물이니 어린 눈에 직관적으로 시리얼을 떠올렸나 보았다. 우유가 스며든 바삭바삭함이든 우유로 숨이 죽은 부드러움이든 캐러멜 계열의 달달함은 아이들의 입에 딱 맞았다. 달짝지근한 미국맛을 우물거릴 때면 동생과 ‘Hello’ 비슷한 영어 발음을 시부렁대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우유에 만 죠리퐁은 기억났지만, 첫 시리얼은 기억에 없다. 하긴 바나나도 첨단 과일로서 시리얼과 비슷한 위상을 누렸지만, 기억도 없고, 운명도 똑같았다. 지금은 둘 다 끼니와 간식 사이의 어중간한 먹거리가 되었다. 다이어트 음식이라지만 둘 다 양으로 조졌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 바나나는 늘 갈변해서 할인 들어간 것을 샀지만, 시리얼은 기본형이 아니라 크랜베리와 아몬드가 들어간 제품을 샀다. 최근 3개월 한 달 평균 식비 235,000원이 안 되는 가계의 별종이었다.
처음에는 내 본래 소비 패턴대로 시리얼도 기본형 제품만 먹었었다. 식량에 요란한 미사여구는 불필요했고, 기본형도 충분히 먹을 만했다. 동네마트에서 기본형을 미끼 상품으로 할인할 때, 쌀팔 듯 600g짜리 네다섯 봉지씩 쟁여 뒀다. 우유로 짝을 맞춰야 하는 것이 번거로울 뿐, 쌓인 시리얼을 보고 있으면 곳간을 채운 최 참판이라도 된 듯했다.
시리얼을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고시원에서 탈출한 이후였다. 공용 냉장고에 900ml짜리 우유를 보관하는 것은 무모했다. 그때그때 200ml짜리 우유를 사 마실 수도 있지만, 200ml짜리 흰 우유는 지금도 내 음료 목록에 없을 정도로 불가해 존재였다. 앉은뱅이 냉장고나마 독점하게 된 20대 후반에서야 시리얼이 내 생활에 본격적으로 스민 것이다. 시리얼에서는 공간의 자유가 너덧 평 더 확장된 권력의 맛이 났다. 가히 미국맛이었지만, 별 거 없었다. 시리얼을 먹을 때 내 표정은 자유의 여신만큼 무표정했다. 생존의 맛, 가성비의 맛이었다.
정작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는 일은 드물었다. 일은 오후에 시작되므로 아침은 늘 여유로웠다. 오전부터 스케줄이 있을 때는 일찍 일어나 느긋하게 움직였다. 내게 아침밥은 융통성 없는 습관이었다. 배가 고파서 먹기보다는 눈 떴기에 먹었다. 끼니는 든든해야 했기에 늦잠을 자지 않는 한, 시리얼이 아침을 대신하는 일은 1년에 몇 안 되었다. 시리얼은 적정량을 먹으면 든든하지 않았고, 든든하게 먹으면 칼로리가 비만해졌다. 햇반 200g에 300칼로리인데, 시리얼은 100g에 400칼로리 안팎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균형 잡힌 영양이 아니라 저칼로리의 든든함이었다.
오직 야식이었다. 건강하려면 취침 전에 음식 섭취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내 안의 아귀를 달래는 제사장의 의무감으로 허기를 관리했다. 취침 두세 시간 전에 뭘 먹어야 마음이 놓였다. 30대 초중반에는 치킨이나 족발로 거창해질 때도 있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간단한 수준으로 조절 가능해졌다. 삶은 계란 두 알, 찐 고구마, 양배추 샐러드, 두부 반 토막 중에서 맛을 생각한다면 시리얼이 무난했다. 밥 반 공기를 넘지 않도록 유의했다. 시리얼은 알갱이가 크므로 밥 반 공기의 부피는 100g에 미치지 못할 거라고 자위했다.
한 때는 두유와 먹었었다. 냉장고가 신통치 않은지 우유는 유통 기한보다 일찍 상하는 일이 잦았다. 여기에 우유 값이 또 인상되는 게 아니꼬워 우유를 손절했다. 두유는 두유대로 시리얼에 잘 어울렸다. 따지고 보면 곡물과 소젖보다 곡물과 콩물의 근친성이 더 컸다. 그러나 우유 가격 때문에 두유로 피신했다는 열등감은 시리얼에 개밥 낙인을 찍었다. 우유에 만 시리얼은 겉보기도 개밥 같았고, 먹을 때도 얼굴이 그릇과 가까워져 내가 개 같았다. 평소 집밥이 교도소 급식만 못해도 괜찮았지만, 개밥에서 존엄성의 최소한이 깨졌다.
두유로 감축한 비용을 시리얼에 재투자함으로써 열등감을 상쇄했다. 열등감은 기묘한 오기와 연동되어 결국은 우유까지 부활시켰다. 외국산 멸균 우유를 박스 단위로 쟁여 뒀다. 마침 주거래 사이트에서 쿠폰을 뿌려대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프리미엄을 붙이지만 사실은 더 저렴해야 할 저지방 우유였으니 저칼로리가 필요한 내게 알맞았다. 미국산 우유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서양식 식사, 미국맛에 좀 더 가까워진 셈이었다.
입맛을 높여 놓고 보니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실질 구매가 100g당 몇 백 원 차이를 고민할 만한 가계는 아니었다. 메인 플레이크 외에 아몬드와 통곡물이 더해져 씹는 맛이 다채로웠고, 특히 말린 크랜베리의 쫀득한 식감과 새콤한 맛이 풍미를 더했다. 크랜베리의 검붉은 반짝임은 내 식사가 무채색이었음을 일깨웠다.
그래 봤자 도시인의 소울 푸드다. 썩 맛있는 색깔은 아니다. 미국맛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침에 우유 한 잔 점심에 패스트푸드의 서울 소울(soul)은 내게 서운할 따름이다. 시리얼을 먹일수록 뼈다귀해장국이 당긴다. 언젠가 자유의 여신님과 뼈다귀해장국 한 그릇 해야겠다. 우리 동네에는 건물주 갑질로 자리를 옮긴 뼈다귀해장국집이 있다. 이럴 계획으로 쓴 글은 아니었는데, 소울푸드를 발견한 듯하다. 시리얼처럼 얼렁뚱땅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