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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22. 2024

가난이 아니라 연인

수이 씨는 다시, 섹스 두 번에 좋아 죽는 날들을 살고 있을까. 2021년 1, 2월의 수이 씨가 부럽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린 연인이었다. 윤우 씨는 주1회 평일 휴무 12시간 근무하는 200만 원짜리 일자리를 두고 고민해야 했고, 수이 씨는 윤우 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기록할 정도로 자기감정에 충실했다. 수이 씨의 다이어리는 윤우 씨와 있었던 일의 기록장이었다.


육공 다이어리 속지 두 장 뿐이었다. 추웠거나 쌀쌀했던 날이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덩그런 손 글씨에 눈이 갔다. 글은 구어 형태로 SNS 안에서나 서식하는 시대, 유물이라도 발굴한 기분이었다. 초성을 상대적으로 크게 쓰는 또박또박한 여자 글씨가 보기 좋았다. 맞춤법, 띄어쓰기가 바른 것도 좋았다. ‘오늘은 날이 많이 흐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스팸, 젓갈, 오이반찬, 김, 밥 든든히 챙겨 먹고 집을 나섰다.’ 정도까지 읽다가 가방에 넣었다. 손 글씨는 버려져서도 힘이 셌다. 속지가 더 있나 살폈지만 없었다. 언젠가 수이 씨 이야기로 글을 쓰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귀가 후 내 책상에서 마저 읽었다. 한 장은 1월 11일~1월 15일의 기록이 있었고, 다른 한 장은 2월 26일~2월 28일의 기록이 있었다. 함께 쓰인 요일 덕분에 연도를 추정할 수 있었다. 2021년 1월 11월 월요일은 구름이 꼈고, 1월 13일 화요일 수요일은 미세먼지가 많았고, 화요일에 있었던 일을 수요일 자정이 넘어 쓴 것 같은 그 날, 수이 씨는 아주 드물게 섹스도 두 번했고, 드라이브도 두 번했고, 또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이 씨는 윤우 씨가 둘의 관계를 상의해 나가는 게 좋았다. 함께 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행복했다. 수이 씨는 윤우 씨로 서술되는 구상(具象)이었다.


1월 11일 윤우 씨는 중국집 면접을 봤다. 근무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아 노가다도 선택지에 뒀지만 결정이 쉽지 않았다. 윤우 씨가 복잡해 수이 씨도 덩달아 복잡했다. 꼬이기만 해서 그냥 돈을 벌기로 결정했다. 단기간에 돈을 모아서 포항으로 간다고 했다. 윤우 씨 근무 조건이나 지역에 맞춰 수이 씨도 일자리를 찾기로 했다. 문맥 바깥에 대리운전과 인력 사무소도 있었다.


1월 13일은 그날이었다. 수이 씨는 피자집이 꼭 되기를 바랐다. 그 와중에도 자신보다 윤우 씨가 먼저였다. ‘윤우가 하고 싶은 배달일 + 내가 하고 싶은 주방 + 나쁘지 않는 높은 급여’라고 썼다. 수이 씨는 윤우 씨가 하고 싶은 걸 천천히, 진심으로 찾기를 바랐다. 당신의 바람은 문단을 바꿔 한 문장으로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 같이 하고 싶다.


1월 15일만 친구 문이 씨와 있었던 일을 썼다. 맥락이 생략되어 있어 구체적인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수이 씨는 사랑하는 사람만 곁에 있으면 소중한 사람을 잘 못 챙기는 스타일이라서 문이 씨에게 미안했다. 수이 씨는 공장 면접을 보러 갔다.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이야기가 불쑥 삽입되었다가 공장 소개시켜준 사람에 대한 불만으로 마무리되었다.


2월 26일 금요일 저녁에는 윤우 씨와 남은 닭강정과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 윤우 씨가 만든 특별 소스가 맛있었다. 저녁 이야기를 해놓고 아침이 Good이라고 한 것은 문맥을 이해할 수 없었다. OO카페에 간 모양인데, 지금은 검색되지 않았다.


2월 27일 토요일 윤우 씨가 병원에 갔다. 동거하는 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수이 씨는 연락을 받자 대충 씻고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윤우 씨는 장염이었다. 병원을 나와 본죽에서 윤우 씨는 홍게죽을 먹고, 수이 씨는 미역죽을 먹었다. 철권은 수이 씨가 이겼다. 윤우 씨 실력을 늘고 있다는 걸로 봐서는 윤우 씨가 일부러 져주는 건 아닌 듯했다. 또 OO카페에 갔고, 수이 씨는 오타바이를 샀고, 윤우 씨도 수이 씨의 애마를 좋아했다. 둘은 같이 한식뷔페에서 저녁을 먹었다.


2월 28일 일요일 윤우 씨가 김치볶음밥을 해줬는데 진짜 맛났다고 했다. ♡까지 붙었다. OO카페가 아닌 다른 카페에 갔고, 자장면 4,000원에 파는 내 단골 중국집에 가서 2인세트를 먹었다. 수이 씨는 중화비빔밥을 좋아했고, 윤우 씨는 배불러 죽으려고 했다.


‘연인’은 ‘가난하고 어린’을 지웠다.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실업과 취업 사이의 불안감, 만족스럽지 못한 임금에 대한 불만, 노동 스트레스가 그득하겠지만, 수이 씨는 윤우 씨로, 윤우 씨는 수이 씨로 덮어버렸을 것이다. 서로를 덮고 있으면 시간에서는 함박스테이크 특제 소스 맛이 날 것이고, 나는 덮을 이름이 없었다. 휑하고 건조한 내 시간에서는 휑하고 건조한 맛이 났다. 2021년 1월 11일~15일, 2월 26일~28일 나는 1피자, 1치킨, 1밀면과 몇 개의 편의점이 뒤섞인 시간을 먹었다. 마스크 안쪽에서 10kg이 불었던 해였다. 그래서 당신들을 응원했다.


2023년, 나는 그 시간에서 아득히 벗어났다. 식비를 두 배 가량 늘렸고, 수입은 그 이상으로 늘었다. 메뉴 선택할 때 1,000원은 더 이상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에서는 2021년과 같은 맛이 났다. 올해 9월까지 설을 제외하면 사람과 먹은 끼니는 열 번이었다. 그나마 세 번은 친구 아버지 장례식 덕분이었다. 9월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카톡 프로필에 11월까지는 아무도 안 만나겠다고 선언하고 지키는 중이라고, 9월 29일 추석 오전에 스타벅스에서 썼다. [무빙]을 멈추지 못해 아침 6시에 어설프게 눈 감았다가 오전 10시쯤 눈을 뜬 상태였다. 오후에 수업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긋지긋했다. 지긋지긋한 것들은 버리지 않아도 버려졌다.


수이 씨는 윤우 씨의 이야기를 버렸다. 기록을 버려 그날들의 구체를 잊었겠지만, 춥거나 쌀쌀한 날, ‘윤우’는 손 안에 고이는 따뜻한 커피 한 잔 같은 온기로 남을 것이다. ‘수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수이 씨라면 어쩌면 새로운 이름을 덮고 있을지도 몰랐다. 새 이름과 함께 다양한 시간을 맛봤을 것이다. 혹은 취업과 실업으로 직조된 홑이불을 덮고 있을지도 몰랐다. 홑이불을 덮으면 쓸 일기가 없을 텐데, 돌이켜 보면 나는 홑이불을 덮고 글을 썼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글을 써도 설명되지 못했다.


누군가를 손글씨로 쓸 수 있는 수이 씨는 지금 안녕할까. 누군가의 손글씨로 존재했던 윤우 씨는 지금 안녕할까. 내 손글씨였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들은 안녕할까. 너를 쓰고 싶은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어서 쓸 말이 없다. 나는 너로 설명되지 못하는 추상(抽象)이다. 춥거나 쌀쌀한 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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