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드래곤볼

by 하루오

“카카로트, 드디어 끝났군.”

선장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멕시코 억양의 영어로 말했다. 눈가에 굵은 주름을 두른 눈빛이 강강해 보였다. 괴물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리감과 친구를 도왔다는 진한 우정에 도취되어 있었다. 선장도 30년 넘는 바다 생활 동안 몸길이 40미터가 넘는 흰긴수염고래를 처음 봤다. 몸무게도 200톤은 넘을 듯했다. 작살이 첫발에 고래의 심장을 꿰뚫지 못했다면, 아마 배가 부서지거나 뒤집혔을 것이다.


초로를 훌쩍 넘긴 카카로트는 이 풍경에 난 구멍처럼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수했던 상상의 조각 중에 이런 감정은 없었다. 죽은 고래 같은 얼굴로 드래곤볼 레이더 위에 반짝이는 한 점을 무연하게 바라봤다. 20년 내내 지구를 휘감던 점이 멈춰 있었다. 카카로트는 점의 깜빡임이 고래의 마지막 심박동처럼 여겨졌다. 고래의 심박동에 맞춰 그의 마음에서도 피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의 체중이 배낭 안에 든, 드래곤볼 여섯 개의 무게로 쪼그라들고, 고래도 곧 쪼그라들 것 같았다.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마워, 캡틴.”

“전혀 즐거운 얼굴이 아닌데? 그 얼굴을 보려고 해경 몰래 널 도운 게 아니라고. 무슨 문제 있어?”

“그럴 리가. 그저 실감이 안 날 뿐이야.”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연안에서, 카카로트가 드래곤볼을 찾아 나선 지 36년 만에 마지막 드래곤볼을 모두 모았다. 드래곤볼 일곱 개를 모으면 용신(龍神)이 나타나 어떤 소원이든 하나를 들어준다. 카카로트는 소원을 정하지 못했다.



시작은 [드래곤볼]의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의 SNS였다.


“(상략) 제가 [드래곤볼]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은 용신 덕분입니다. 삿포로에 여행 갔다가 눈밭에 조난당한 나메크성인을 구해주고 드래곤볼을 선물 받았습니다. 아, 그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덴데였습니다. 그는 우주 배낭여행 중이었답니다. 드래곤볼을 제게 선물해준 것이 고마워서 그를 신으로 설정했던 거죠. 아무튼 저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용신을 소환했습니다. 1983년 겨울 밤, 삿포로에서 거대한 용오름을 보셨다면, 아마 그게 용신이었을 겁니다. 조금 부끄럽지만 제 소원은 ‘세계 제일의 만화가가 되게 해주세요.’였습니다. 장편을 그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소원을 빌고 나자 머릿속에 [드래곤볼]이 떠올랐습니다.

점프 랜드에서 판매한 드래곤볼 기념품 중에 진짜 드래곤볼 하나를 섞어 놓았습니다. 제 소원을 들어준 직후 드래곤볼이 전 세계로 흩어질 때(만화에 그린 것처럼) 하나가 설산 오두막에 처박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찾아서 보관하던 것이었습니다. (깨진 창문 값을 보상 완료!) 그것을 기념품 속에 섞어 놓았는데, 팔렸더군요. 진짜를 알아보는 것과 나머지 여섯 개를 찾는 것은 독자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흩어진 드래곤볼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기적은 분명, [드래곤볼]처럼 존재합니다. (하략)”


카카로트는 동경대 학회에 갔다가 들린 점프 랜드에서 기념품으로 드래곤볼 4성구를 샀었다. 해외 학회가 그렇듯 하루 이틀 정도 관광 일정이 끼어 있었는데, 교수는 자기만 일정을 늘려 다른 교수들과 온천 여행을 간 덕분에 학생들끼리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고백을 들었을 때, 카카로트는 그냥 웃어 넘겼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개그 본능은 어쩔 수 없다고 치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취방을 옮기는 과정에서 짐 일부를 연구실에 가져온 적이 있었다. 우연히 드래곤볼을 양자메타물질 굴절률 측정기와 제이커브 측정기 사이에 놓았는데, 두 기기가 강렬하게 반응했다. 실험 중에 봤던 수치보다 100배씩은 큰 반응이었다. 혹시나 싶어 드래곤볼의 밀도를 측정해보니 그가 학위 논문에서 가정했던 압축률을 증명했다. 학위를 때려치우지 않으면 교수를 때려죽일 것 같아서 드래곤 레이더를 만들어 드래곤볼 찾기를 시작했다.



“이봐, 자네 이름은 뭔가?”
가장 나이 많은 셰르파가 영어로 떠듬떠듬 카카로트에게 물었다. 셰르파들과 일본인 여행객의 시선이 카카로트에게 몰렸다. 하얀 입김이 사람들의 얼굴을 감싸며 퍼졌다. 카카로트가 네팔 남체(Namche)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산장에서 잠시 눈을 피할 때였다. 에베레스트에서 잠시는 한 시간이 될지, 나흘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초봄, 무리하게 산행을 강행하다가 당한 낭패였다.


당시 카카로트는 당근을 먹고 있었다. 산장의 벽면에 밴 이국의 기름 냄새가 역했다.

“캐, 캐롯.”

“카카로트? 독특한 이름이군.”
얼떨결에 대답한 것이 카카로트가 되었고, 그곳에서 3성구를 찾았다. 찾아나선지 10개월 만이었다. 그것이 초심자의 행운일지는 몰랐다.



모두가 고래 위에 모였다. 선원들은 어머니 같은 카카로트의 소원이 달성된 것을 축하하며 벌써부터 럼을 마셔댔다. 드래곤볼을 럼 상자 안에 모아 놓았다. 고래가 수직으로 닿는 하늘에 까만 점이 찍히더니 먹장구름이 방사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쏴아, 멀리서 물이 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사방에서 해일이 닥쳐오고 있었다. 고래 위에 있던 선원들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하고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해일이 배와 고래를 집어 삼킬 듯이 닥쳐오더니 하늘로 솟아 거대한 물기둥을 형성했다. 그 순간, 슝,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에서 붉은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빛이 관통한 구름 안에서, 만화에서 보던 그대로의 용신이 나타났다.


선장과 선원들은 용신과 카카로트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겁 많은 선원은 납작 엎드렸고, 대담한 선원은 용신을 향해 스마트폰을 쭈뼛쭈뼛 꺼내들었다. 용신은 카메라에 찍히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소환했는가? 어떤 소원이든 말하라. 하나는 반드시 들어주겠다.”


용신의 말은 텔레파시 같았다. 언어도, 파동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모두에게 들렸다. 용신의 말을 듣자 카카로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소원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계 정복, 영원한 젊음도 다 부질없어 보였다. 지금 마음속에 놓여 있는 것은 솔직히, 귀찮음이었다. 사실은 고래를 잡은 직후부터 생겨난 이질감이었다. 36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남미 밀림 속에서 부족 간 전투에 휘말리기도 했고 사하라 사막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소식도 1, 2년 후에나 알았다. 지난 일들과 드래곤볼과 용신과 내 소원은 연결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차원의 사건 파편들이 억지로 모여 이가 맞지 않는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인생인가 싶었고, 그런 시간이 늘어난다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반드시 인생이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났다.

“……”


“다시 한 번 묻겠다. 그대가 이루고 싶은 소원은 무엇인가?”


“…….”

“카카로트,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어서 대충 빌고, 이따 한잔 거하게 하자고. 아무래도 내가 들어야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선장이 넌지시 말했다. 흥분과 피로감 때문이었을까, 카카로트는 이제 좀 확실해졌다. 지금은 얼른 할 일을 끝내고 갑판 위에서 선장의 파이프 담배 냄새를 맡으며 느긋하게 한잔하고 싶었다. 반쯤 취한 상태에서 그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선장이라면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줄 것 같았다. 내가 카카로트라고 하자 자신을 베지터로 지칭한 친구였다. 지난 7개월간의 바다 생활이야말로 인생의 황금기였다.


“어이, 캡틴. 혹시 이 배에 일손이 필요하지는 않나?”

“요즘 기계화가 워낙 잘 돼서……, 근데 방금 부선장 자리가 하나 난 거 같은데.”

“아, 그리고 보물찾기는 좋아하나?”

“보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던가?”
선장이 엄지를 치켜 올리며 씩 웃었다. 카카로트가 웃음을 받았다. 용신을 보며 외쳤다.

“당신의 뼈를 갖고 싶습니다.”


선원들은 일동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옆 사람과 수군댔다. 벌써 취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선원도 있었고, 인센티브를 못 받을지도 모른다고 불평하는 선원도 있었고, 대체 왜 그런 소원을 비는지 모르겠다며 본인이 더 아까워하는 선원도 있었다. 선장만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띠었다.


“음…… 좋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드래곤볼이 공중으로 튀어 올라 사방으로 사라지며 사위가 번쩍하더니, 용신도, 먹장구름도, 용오름도 사라졌다. 다시 바람이 불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그뿐이었다. 없어진 것도, 더해진 것도 없었다. 선원들이 두리번거리며 웅성댔다. 선장은 눈짓으로 자리 정리를 시켰다.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카카로트는 하늘의 먼 곳을 봤다. 끝을 봤으니 됐다는 생각과 생각의 생각을, 꾹꾹 눌렀다. 생각을 누르는데 눈물이 났다. 선장이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오늘은 아무래도 숨겨둔 1968년 산 샤또를 풀어야겠군, 부선장 친구.”

“내 이래서 널 좋아한다니까, 캡틴 베지터. 오늘은 밤새 초사이어인 전설을 이야기해주지. 나 꽤 힘들었다고. 아무한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니까 끝까지 들어줘야 해.”
선원 중 하나가 소리쳤다.

“카카로트 아저씨! 이걸 좀 보세요.”


카카로트가 뒤돌아봤다. 라울이 럼 상자 안에서 농구공만 한 유리 구체를 꺼냈다. 구체의 중심에, 용의 형상을 한 뼈가 구름처럼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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