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굣길. 차가 밀린다. 버스 안은 만원이다. 사무엘 외고 2학년 현우와 기범은 뒷바퀴 윗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다. 창가에 앉은 현우는 다리를 오그리고 있어야 해서 불편하다.
기범 : 왜 이렇게 밀릴까?
현우 : 그러게. 다리가 아프다.
기범 : 벌써 7시 45분이다.
현우 : 시험공부는 했냐?
기범 : 나는 영어가 싫다. (손에 들고 있던 영어 단어장을 덮는다.)
현우 : 시험 끝나면 뭐 하지?
기범 : 자살이나 할까?
현우 : 영어 선생 살고 있는 아파트 안다. 별로 안 멀어.
기범 : 차가 너무 밀리는데. 이러다 지각하면 어쩌지?
현우 : 영어 선생 아파트에서 뛰어 같이 뛰어 내릴까? 집값이라도 떨어지게.
기범 : 영어는 2교시든가?
현우 : 영어! 영어! 영어! 여기는 한국이야.
기범 : 우리는 외고생이지.
현우 : 그러게. 왜 고생이지?
기범 : 늦으면 어쩌지? 큰일 나겠는데.
현우 :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기범 : 이럴 땐 고생대 삼엽충이 되고 싶다.
현우 : 나는 고대생이 될 거다.
기범 : 고대보다는 연대지.
현우 : 102기갑 연대?
기범 : 그 날은 오겠지?
현우 : 올 걸.
기범 : 난 기다린 적 없는걸?
현우 : 그게 뭔 상관이냐? 그딴 걸 누가 기다린다고. 차가 너무 밀리는데.
기범 : 시험공부, 시험공부, 시험공부 하다가 군대라니. 역시 자살이나 할까?
현우 : 이거 딱 지각각(角)인데.
기범 : 선생들도 지각일 테니까 걱정 없는 거 아닐까?
현우 : 계속 오므리고 있으니까 다리가 아프다.
기범 : 우리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현우 :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잖아.
기범 : 이제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현우 : 정체가 풀리길 기다리는 중이야.
기범 : 그럼 네 정체는 과연 뭐야?
현우 :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라고나 할까.
기범 : 너 몇 살이냐?
현우 : 이 짓도 지겹네. 뭐 먹을 것 좀 없냐?
기범 : 영구 없다.
현우 : 그래 이 정체가 영구하진 않겠지. 하지만 우리는 지각할 수 있다는 거야.
기범 : 길이 막혀서 이렇게 된 건데, 지각 처리하면 죽어버릴 테야.
현우 : …….
기범 : …….
현우 : …….
기범 : …….
현우 :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실까?
기범 : (영어 단어장을 가방에 넣고 가방을 뒤지며) 기다리겠지. 학교 종이 땡땡땡이니까.
현우 : 우리 학교는 땡땡땡이 아니잖아.
기범 : 이거나 먹어라. (금메달 모양의 초콜릿을 건넨다.)
현우 : (초콜릿을 받으며) 땡칠이 돼지 국밥이 먹고 싶다.
기범 : 작작 좀 해!
현우 : 왜 화를 내고 그래?
기범 : 차가 밀리고, 머리가 아프고, 하늘이 맑아.
현우 :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기만 할 거야?
기범 : 그러면 잠이나 잘까?
현우 : 잘못했어. 기다리자.
기범 : 역시 그 수밖에 없어.
현우 : 영어 시험말인데.
기범 : 작작 좀 하라니까!
현우 : 왜 화를 내고 그래?
기범 : 차가 밀리고, 머리가 아프고, 맞다 게보린.
현우 : 병신아, 우린 생리통은 안 하잖아.
기범 : 근데 이 두통은 너무 실감난단 말이지.
현우 : 나는 게보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기범 : 네 발언은 삼진제약이 싫어할 거야.
현우 : 이대호는 어제도 삼진인가?
기범 : 씨발 꼴데 새끼들!
현우 : 개새끼들!
기범 : 씹새끼들!
현우 : 영어 선생 똥구멍에 대가리 처박을 새끼들!
기범 : 그건 너무 하지 않아?
현우 : 하지만 걔들은 야구를 못하잖아.
기범 : 우리는 영어를 못하잖아. 외고생인데.
현우 : 그래 우린 왜 고생을 사서하는지 모르겠다.
기범 : 우승하려면 대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
현우 : 아무리 길이 막혀도 30분 안에는 도착하겠지.
기범 : 창밖을 봐. 걷는 사람들이 더 빠르다.
현우 : 이대호 도루 하는 소리하고 있네.
기범 : 자살하는 소리 아닐까?
현우 : 유서는 꼴데 새끼들이 우승 못했기 때문이라고 쓰자.
기범 : 지금 쓸까?
현우 : 귀찮아.
기범 : 잠 온다.
현우 : 자.
기범 : 귀찮아.
현우 : 대체 언제까지 이 지랄을 해야 하는 걸까?
버스 옆을 지나가던 우성이 현우가 있는 창을 두드린다. 현우는 깜짝 놀란다.
우성 : 뭐 하냐?
현우 : 학교 가지.
우성 : 언제 길이 풀릴지 알고. 걷는 게 더 빠르잖아.
현우 : 다리 아프다.
기범 : 난 머리 아프다. 게보린 좀 있냐?
우성 : 난 먼저 간다. 걸어가도 지각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우성은 현우와 기범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주먹을 남기고 학교 쪽으로 뛰어간다. 현우와 기범이 점점 작아지는 우성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현우 : 이제 안 보이는데.
기범 : 우리도 걸어갈까?
현우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