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평범한 말에 마음을 저격당할 때가 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도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저격당한 것은 마음의 전자(電子)다. 마음은 원자처럼 핵(核)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전자는 핵 주위를 빠르게 돌고 있다. 전자가 만들어낸 희뿌연 궤적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을 자신도 못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 한두 번쯤 말과 전자의 타이밍이 맞아버릴 때가 있다. 말에 저격당한 전자의 운동 에너지가 마음의 핵과 충돌한다. 짧은 순간, 마음은 본심을 드러낸다. 마음이 찡해지는 것도 같고, 뭉클해지는 것도 같다. 마음의 핵이 분출하는 운동 에너지는 화연을 오포동행 버스에 오르게 했다. 화연은 대학 졸업 전후로 시들기만 하던 마음에도 운동 에너지가 남아 있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냥 누군가가 제게 열심히 이야기를 해주는 게 좋았어요. 그리고 저도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요.
한 달 전쯤이었다. 미안함을 숨기지 못하지만 담담하던 그 말이 총알이 되었다. 50분 넘게 상품 설명을 하며 어쩌면 세 개, 최소한 치아 보험 정도는 따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 전화 속 남자는 미안하다고 했다. 쉬는 시간까지 넘겨가며 진을 뺐지만 맥이 빠지거나 화가 나기보다는 울컥했다. 문득, 화연도 이야기가 하고 싶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보험 상품 소개는 아니었다.
상담사님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지요?
백화연입니다.
백화연 님……. 취업하면 꼭, 이쪽으로 전화해서 백화연님 통해서 뭐든 하나는 가입할게요. 진짜예요. 죄송하고, 고마웠습니다.
28세 정영동 씨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화연은 얼떨떨했다. 고맙다는 말이 마음을 더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냉대와 모욕이 바퀴벌레처럼 바글거리는 전화 속에서 고맙다는 말은 맑고 따뜻했다. 거의 마지막 콜이었기에 망정이지, 오전이었으면 온종일 들뜨고 싱숭생숭할 뻔했다.
이날 화연은 맥주 한 캔에 알딸딸하게 취한 채로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밤 9시, 아마도 하루를 갈무리하고 자기 시간에 폭 안겨 있을 지인들과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만나자고 할까봐 망설여졌다. 만나면 괜찮은 밥을 먹어야 하고 굳이 마실 필요도 없는 커피를 마시는 데 돈을 써야 했다. 불을 끄고 누웠다. 아직 도서관에 틀어 박혀 사느라 전화를 꺼두는 대학 친구에게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전화를 걸었다. 관속 같은 어둠 속에서 냉장고가 ‘웅-’하고 돌아가는 소리에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화연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지도 몰랐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는 것이라고는 이 일도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적 압박이 매달 목을 졸랐다. 온종일 목이 막힌 채로 ‘라’음에 맞춰 상냥하게 전화를 돌리고 나면 자신에게 상냥할 에너지는 고갈돼 버렸다. 자신이 누구로 살았는지 자괴감이 드는 것도 올해 중순까지였다. 이제는 자신을 파먹는 일에 익숙해졌다. 대신 파b 정도로 우울해졌다. 학자금 대출이 남아 있었다.
이름을 들어도 잘 모르는 4년제 대학에 왜 물리학과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수능 점수를 꾸역꾸역 맞춰 일단 입학하고 본 것은 한심한 일이었다. 인간사도 물리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힘의 세계라는 소소한 개똥철학을 건졌다. 그것을 안다한들,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헛되고 무모한 4년이었다. 올해 초에 입사한 신입처럼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면 최소한 2,000만 원이 넘는 빚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후회도 견뎌야 했다.
영동은 오포동 변두리에 소재한 4년제 대학 출신 취준생이었다. 지금은 모교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라고 했다. 고시원과 도서관만 오갔다.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전화 상담원에게 다정하게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문제 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랬듯이 화연도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우연과 인연 사이에 필연이 있는지, 인연과 필연 사이에 우연이 있는지 몰라도 둘은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화연의 예상대로 영동은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단정하고 바른 말씨를 듣고 있으면 인생이 그리 엉망진창은 아닌 것 같았다. 화연은 퇴근하고 나면 입도 떼기 싫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배도라지즙을 빨아가며 재잘대고 있었다.
마음의 작용-반작용은 서로를 예쁘게 다듬어 줬다. 호의적인 힘이 남기는 파동이 존재의 부스러기들을 털어내고 알맹이를 맨들맨들하게 다듬어주기 때문이다. 전화를 하고 있으면 화연은 전화상담원으로 국한되는 소모품이 아니었고, 영동은 나이 스물여덟에 부모님 등골 빨아 먹는 기생충이 아니었다. 영동은 화연에게 해맑은 사람이라고 했고, 화연은 해맑은 자신이 좋았다.
나흘 전부터는 서로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똑같은 일상 속에서 말이 매번 생성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화연은 둘 사이에 놓인 침묵조차 듣기 좋았고, 침묵도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은 더 좋았다. 침묵 속으로 숨소리가 교차될 때 미묘하고 야릇한 감정이 등허리를 훑었다. 영동과의 연애를 상상했다. 마음의 핵에 고인 운동에너지가 얼굴에서 열에너지로 폭발하는 듯했다. 설렘의 열에너지로 칼로리를 소모하기 때문에 연애하면 예뻐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영동과는 학식을 나눠 먹고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셔도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우리 만날래요?
본심이 제멋대로 튀어나갈 때가 있다. 응축 될 대로 응축 된 열에너지가 스스로를 참지 못한 탓이다. 영동은 화연이 함부로 쏘아 올린 말을 30초쯤 가지런히 쓰다듬듯 침묵하다가 그러자고 했다. 화연은 그 신중함도 좋았다. 퇴근 후 화연이 영동이 있는 대학교 정문으로 가겠다고 했다. 거리상으로 멀었지만, 논밭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정체 없이 버스로 30분이면 충분했다.
화연은 정문 건너편에서 내렸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가는 기간이라 학교 앞은 한산했다. 대신 눈이 내렸다. 첫 만남, 첫눈, 낭만적인 감상에 한결 들떴다. 엄격하기만 하던 세상이 영동처럼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오늘 입은 속옷을 떠올렸다가 도리질 쳤다. 설마. 가슴 아래쪽에서 잔거품들이 톡톡 터져댔다. 온 몸이 간질거렸다.
전화 하지 않는 것이 오늘 만남의 규칙이었다. 영동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 나누고 있듯이 서로 알아보겠죠.’라며 제안했고, 화연은 소소한 낭만이 좋았다. 그 낭만 속에는 필연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숨겨져 있는 것은 더 좋았고, 눈이 쌓여 길이 막혀 버리면 더 좋을 것 같았다.
화연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 영동을 기다렸다. 어디로 가든 이쪽을 지나쳐야만 했다. 학교에서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와 화연이 있는 곳과 4차선 도로 맞은 편 버스 정류장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을 보며 누가 영동일지 기대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랄라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지만 20분이 지나자 초조해졌고, 30분이 지나자 뭔가 잘못 되어가는 것 같았고, 40분이 지나자 소매에 올이 나간 코트와 뒤축이 닳은 부츠가 새삼 부끄러웠다. 문득, 손이 시렸다.
사실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 이쪽을 바라보며 30분째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커서 폭 안길 수 있는 늠름한 윤곽은 보였다. 남자는 화연을 바라보고 있었고, 화연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하고 친밀한 침묵이었다. 버스 정류장 안내방송만 성실하게 떠들어댔다. 거리는 비어 가고 있어서 건너편의 방송음까지 다 들렸다. 화연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남자도 전화를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기어이 한 시간을 넘기자 화연은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 때 배운 기초적인 물리 법칙, 같은 극끼리는 밀어낸다.
화연 쪽 정류장에서 다음 버스 도착을 알렸다. 화연은 건너편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남자는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뭔가를 한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화연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그으며 버스가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맥주 두 캔은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영동의 번호를 차단했다. 건너편 남자는 여전히 앉아서 화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 사이로 버스가 끼어들었다.
버스가 떠나고 나자 남자는 아무도 없는 건너편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화연을 태운 버스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