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리뷰
이 책을 읽으며 쭉 든 생각은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죽음'과 '영혼'에 관한 이야기가 글을 쓰는 모든 작가들에게 하는 말 같았다는 것.
책을 읽지 않는 세상, 왜 책을 내느냐?
책이 돈이 되지 않는 세상, 왜 글을 쓰느냐?
아무도 읽지 않는 글, 서점에 재고로 쌓여가는 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마도 많은 글쓰는 이들이 자문하거나 문답했을 것이다.
이상하게 나는 이어령 선생의 이책속의 글이 여기에 답을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으로 사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혹은 사회의 상처를 활시위로 바꾸는 행위를 해나가는 것.
덮어놓고 사는 일상을 들추고,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기에 기록하는 것.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막, 진짜 나와 가짜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막,
그 얇은 막을 관찰하고 가끔 그 막에 구멍을 뚫어보는 것.
희로애락의 구비구비 자신 삶의 무늬를 활자로 새겨넣는 것.
이어령 선생의 말을 빌어 나는 그게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영혼이 육체보다 장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지음)
이 책은 이어령 선생이 돌아가시 전 마지막 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일회성 인터뷰가 아닌 꽤 오랜 기간에 걸친 인터뷰.
그속에 내 바디body 를 거쳐 mind에 들어와 spirit을 울린 구절만 담아보려 한다.
이 바디, 마인드, 스피릿은 책에 나오는 개념이기도 하다.
01. 마인드를 비워야 영혼이 들어간다
유리컵이 한잔 놓여있다.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만, 원칙적으로 비어 있어야한다.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하므로 비어 있는 것, 그것이 void(빈 공간)이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나?
끝도 없다. 우주까지 닿는다.
그게 영혼(spirit)이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다.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다.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어있던 면을 채웠다.
이게 마인드mind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뀐다.
물도 되고 와인도 된다.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다. 우리 마음이 늘 그렇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듯.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나? 컵이다.
컵이 우리의 육신 body다. 결국 컵이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뿐.
사람이 죽으면 컵은 깨지고, 물도 다 사라진다.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는다.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나온다.
마인드를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공간이 생기므로.
02.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배꼽처럼.
검시관들이 시체를 해부할 때는 반드시 배꼽 중심으로 배를 가른다. 똑같은 배꼽이 하나도 없다.
배꼽은 몸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비어 있는 중심이다.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지금은 막혀 있지만 과거엔 뚫려 있었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다.
찻잔을 몸에 올려놔야 한다면 어디다 놓겠는가?
배꼽 뿐이다. 비어 있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다.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가만히 웃으며.
03. 작가의 영혼이 육체보다 장수하는 이유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게 마지막 희망이다.
그게 작가다.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다.
죽음에 대해 쓰는 것.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
성경의 욥 이야기를 보라.
재산도 잃고 자식도 죽고 고통스러운 피부병에 걸려 폐허속에서 돌로 몸을 긁은 욥.
욥의 아내가 '네가 그렇게 사랑한 신이 너한테 준 게 뭐냐? 그 신을 저주하고 죽어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욥은 결국 원망을 쏟아냈다.
그때 한 말이 무엇일까.
'이 고통을 반석 위에 쓸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억울한 것을 바위 위에 새길수 있다면...그게 욥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04.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
하이데거가 그랬다. 일상적 존재는 묻혀있는 존재라고.
덮어놓고 살면 안된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덮어놓고 살므로.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다.
05.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인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된다.
나는 타인의 아픔을 모른다. 자기 마음이 아픈 것 뿐이다.
자식이 어머니를 목숨처럼 사랑하고, 어머니가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해도 자식은 어머니가 될 수 없고 어머니는 자식이 될 수 없다.
그 사이에는 엷은 막이 존재한다.
06. 다름의 값을 치르고 자신으로 살라
착하지 않아도 죄책감 느끼지 않고, 예쁘지 않아도 개성으로 긍정하며,
그 '다름의 값'을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타인의 마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용기 있는 사람들,
'진짜 나'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
이 세계는 그렇게 '진'의 세계를 수만가지 바코드의 선과 미를 재배열하며 나날이 팽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에서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차마 못 한 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 따먹은 썩은 아가베 열매가 더 달았어요'
07. 화문석이 될 것인가, 무문석이 될 것인가
강화도에 화문석이 유명하다. 꽃 화 자에 무늬 문자. 그런데 무늬가 있는 화문석보다 무늬 하나 없는 무문석이 더 비싸다.
그이유를 물으니
'화문석은 무늬를 넣으니 짜는 재미가 있지요. 무문석은 민짜라 짜는 사람이 지루해서 훨씬 힘듭니다'라고 답했다.
인생도 그렇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다.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낸다면, 가난해도 행복한 것.
화문석이 곧 아이덴티티다.
자기 무늬의 교본은 자기 머리에 있다.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08. 상처와 활은 하나다
보들레르의 시를 가지려면 그의 상처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악의 꽃'을 읽으며 감동하지만 그의 아편쟁이 삶을 가지려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둘을 분리해 낼 수 있을까.
'필록테테스'라는 작품이 있다. 트로이 전쟁 중 필록테테스라는 왕이 있었다.
배를 타고 트로이로 가다 잠시 섬에 들렀는데 거기서 독사에게 물려 전신에 독이 오르고 절규했다.
결국 그리스군은 그를 섬에 버렸다. 무인도에 그는 혼자 벌려져서 고통과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이 끝나지 않자, 신탁은 예언 했다.
'헤라클레스의 활이 필요하다'고.
그 활을 갖고있는 자가 필록테테스였다.
결국 그를 찾아 활만 빼앗아 오기 위해 아킬레스의 아들이 섬에 도착한다.
하지만 10년 동안 외로운 섬에서 고통과 싸우며 죽음과 대면한 필록테테스의 영혼을 마주한다.
'활을 훔치러 왔지만, 당신을 여기 두고 활만 갖고 갈수는 없습니다. 활은 당신의 상처이고 상처는 당신의 활입니다'고 말한다.
삶의 고통은 피해가는게 아니다. 정면에서 맞이해야지.
고통은 남이 절대 대신할 수 없다. 오롯이 자기 것.
상처를 가진 자가 활도 가질수 있다.
09. 파도와 촛불 사이에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라.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게 있으므로.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 없지만.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한다. 죽음과도 같다.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다.
돌아갈 곳.
촛불도 마찬가지다.
촛불이 수직으로 타는걸 본적이 있나? 없다.
항상 좌우로 흔들린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 왜 흔들리나?
중심으로 돌악가기 위해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그게 살아있는 것들의 힘이다.
촛불은 끝없이 위로 불타오르고, 파도는 솟았다가도 끝없이 하락한다.
하나는 오르려, 하나는 침잠하려 한다.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