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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un 15. 2017

다양성과 공감, 팀워크의 뿌리

미드 '센스8'이 전하는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

얼마 전 넷플릭스가 미드 '센스8(Sense8)'의 후속 시즌 제작을 취소했다는 기사가 눈을 사로잡았다. HBO '왕좌의 게임'과 거의 맞먹는 수준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들이 돌지만, 넷플릭스는 정확한 취소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배두나가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했기 때문에 2015년 시즌 1이 방영되었을 때부터 '센스8'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역시 배두나가 출연했던 워쇼스키 자매의 전작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2012)'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는 않았기에 한국 배우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찾아보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들,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나  '더 크라운(The Crown)' 등을 즐겨 봤던 편이었는데, 어찌 됐건 '센스8'이 두 시즌만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하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어 첫 에피소드를 틀어 보기 시작했다. 23개 에피소드를 모두 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국 왕실을 무대로 한 '더 크라운'보다 훨씬 몰입도가 높았다.


솔직히 말해 기대 이상이었다. 한때는 형제였으나 성전환 수술을 통해 이제는 자매가 된 워쇼스키 자매(The Wachowskis)가 제작을 맡았기에 어느 정도 성소수자(LGBT)들에 대한 보다 너그러운 시각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종적, 성적 다양성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는 미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나라 드라마에서도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학생증은 만료됐어도 아직 마음은 학교에서 멀리 떠나지 못한 내게 '센스8'은 지난 2년간의 MBA 생활과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 더욱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센스8' (사진: IMDB)


'센스8'이 보여주는 주연 배우들의 조합은 백인 남녀 배우 중심인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들과는 거리가 있다. 미드의 경우 영화와는 달리 '그레이 아나토미(Gray's Anatomy)'나 '로스트(Lost)'에서처럼 그나마 다채로움을 추구하는 편이지만, 이 정도의 지역적, 성적 다양성을 담아내고 있는 드라마를 찾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여덟 명의 주연 배우들 중 백인 배우들은 딱 절반이고, 나머지는 인도, 케냐, 멕시코, 한국인으로 채워졌다. 백인 배우들도 극 중 출신 배경이 미국 중부와 서부, 아이슬란드와 독일이다. 성적 정체성으로 따져보면 이성애자 여섯(남자 셋 여자 셋)과 동성애자 둘(한 명은 게이, 한 명은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다)이다. 이러한 조합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를 지켜보면서, 나로서는 절로 경영대학원에서 마주쳤던 다양한 색깔의 친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듀크를 비롯한 각 학교의 MBA 과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6명 내외의 팀, 60-70명 내외의 반으로 구성된다. (퓨쿠아 경영대학원에서는 이 단위를 섹션(Section)이라고 부르는데, 학교마다 명칭은 클러스터(Cluster), 코호트(Cohort)등으로 조금씩 다르다.) 내 경우에는 미국(메릴랜드, 필라델피아, 위스콘신 주), 중국, 칠레에서 온 친구들과 같은 팀이 되었고, 이렇게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10여 개 팀이 함께 모여 1학년 전공필수 수업들을 함께 수강했다. 주간 과정의 외국인 학생 비중은 40% 수준이었는데 인도, 중국, 브라질, 한국 출신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페루, 콜롬비아, 우루과이,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등 생전 처음 만나는 국적의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30여 년을 자라 온 내게, 이 정도로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집단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국 사회가 물론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동질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그럴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집단 속에서 오직 나만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팀원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들 역시 그들이 소속되어 살아왔던 정체성 집단을 넘어 이렇게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구성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적 코드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며 과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은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곧잘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나야 한다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과연 내가 얼마나 아무런 스스럼없이 다른 배경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우정을 쌓았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단언컨대 나보다 훨씬 더 멀리 컴포트 존을 벗어나 긴밀한 관계 맺음을 통해 성장한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나 역시, 지난 2년은 부족하게나마 공동체 속 한 개인으로서의 나를 성찰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나라들을 적지 않게 여행해봤다고 자평하지만, 분명히 잠깐 스쳐 지나가는 짧은 만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같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전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때론 협력하고 때론 맞부딪쳐가며 팀으로서 목표에 다가서는 경험은 그래서 너무나 소중했다.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지구 상 어딘가에 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들과 함께 같은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겨보진 못했을 것이다.


'센스8'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서 각자가 처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분투한다. 혼자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다른 친구들이 나타나 도움을 준다. 싸움을 잘 하는 친구, 운전을 잘 하는 친구, 해킹을 잘 하는 친구, 연기를 잘 하는 친구... 각자가 가진 재주들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각 에피소드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들을 보며, '그렇지, 팀워크라는 게 저런 건데...' 하며 무릎을 치는 순간이 많았다. 다른 배경과 맥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가 발달시켜 온 능력이 다르다. 동일한 잣대에서 놓고 보면 어떤 능력은 하찮아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저 쓰일 수 있는 상황이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다. 모든 것에 완벽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란 존재할 수 없기에, 그래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팀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혼자보단 여럿이, 비슷한 배경보다는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팀이 보다 나은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영어도 완전치 않고, 아시아에서 온 친구들에게 주로 기대하는 퀀트(Quant), 재무적 역량조차 영 시원찮았던(!) 내가 거의 매 수업마다 반복되는 팀 프로젝트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다양성의 일부나마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만큼 서로 공감할 수 있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센스8' (사진: IMDB)


다양성은 팀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 중 하나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저절로 좋은 팀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 정도가 충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양성이 가진 잠재력의 극대화 여부는 팀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공감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엠퍼시(Empathy).


센스8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소속된 클러스터(Cluster) 속 인물들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영화 속에서는 이들을 센세이트(Sense8, Sense-eight)이라고 일컫는다. (극 중에서 주인공들의 평범한 친구들은 이 기묘한 상황을 '휴대폰 없이 하는 페이스타임'이라고 이해한다.) 주요 캐릭터들의 중심 무대가 나이로비, 런던, 멕시코 시티, 뭄바이, 베를린, 샌프란시스코, 서울, 시카고로 각자 다르지만, 한 클러스터에 속한 이들은 서로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감정과 고통마저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구분하자면 공상과학 장르(SF)에 속하는 '센스8'에서 가장 핵심적인 설정인데, 워쇼스키 자매는 이 설정을 통해 자기 문제에만 함몰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감능력 부재를 비틀어 꼬집는다.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인도 제약학자인 칼라(Kala)가 자기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사장인 남편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약품들을 수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 부분이었다. 칼라는 그녀와 감정을 공유하는, 소울메이트와 같은 케냐의 카피우스(Capheus)가 에이즈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 얼마나 약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다. 그런 칼라에게 남편의 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남편은 왜 그렇게 칼라가 분노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제약회사 오너인 남편에게 다른 나라에 있는, 유통기한이 만료된 제품의 최종 소비자는 그저 숫자로서 존재할 뿐, 전혀 공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극 중에서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면, 시리아 내전을 비롯하여 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참상에 대해 무심할 수 있을까? 정확히 1년 전 이맘 즈음, 워싱턴 D.C. 에 있는 아쇼카(Ashoka) 재단 본부에서 사회적 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 전공 트랙과 연계된 인턴십 과정을 통해 짧게나마 국제적인 비영리단체가 움직이는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지만 특히나 새롭게 다가왔던 깨달음 중 하나는 공감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공감능력 역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릴 적부터 정성 들여 길러내야 하는 능력들 중 하나라는 관점이 무척 독특했다. 어쩌면 기업이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공감능력의 증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런 부분에 주목하고 있는 아쇼카는 공감을 시작하세요(Start Empathy) 등 프로그램을 통해 유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감교육의 전파를 주요 사업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고(故) 신영복 선생님도 책에서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말씀을 남긴 적이 있다. '센스8'을 보며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 주인공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비록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자신과 100% 조응하는 다른 일곱 명의 친구들이 자신의 일을 마치 내 일과 같이 돕는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다른 친구들이 살고 있는 낯선 사회를 만나고, 그들의 사정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 관계의 최고 형태, 즉 모든 감정과 고통을 공유하는 상황에서는 상대와 동일한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모습을 '센스8'은 시각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센스8' (사진: IMDB)


결국 성과를 내는 팀을 만드는 핵심은 바로 두 가지, 다양성과 공감능력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좋은 팀워크를 만든다. MBA 매 수업 때마다 교수님들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배경의 팀을 구성하기를 권장하는 것도 이러한 경험칙의 연장선상이라고 본다. 또한, 나 역시 자기만의 공간을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멤버들과 교류하며 공감하고자 하는 친구들이 많을수록 그 팀이 도달코자 하는 목표에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높아진다는 것을 적잖이 경험한 바 있다.


좋아하는 신 선생님의 서화 중에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라는 작품이 있다. 그 말처럼, '센스8'의 주인공들은 그야말로 험한 길들을 헤쳐 가는 가운데서도 소소한 즐거움의 끈을 놓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 공감능력 100%의 팀원들이 함께 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넷플릭스의 시즌 3 제작 취소 결정으로 인해 그들이 만끽할 다음 여정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故 신영복 선생님의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 (서화: www.shinyoungbok.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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