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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Aug 01. 2022

'품위와 에티켓의 모범'을 향하여

육아휴직 이전, 마지막 팀장님의 편지


000 과장님!

함께 근무하는 동안 가정의 아이들 돌보며 회사일 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휴직이 끝나고 근무하면 내 글을 읽을 것 같은데

과장님은 우리 팀의 직원으로서 품위와 에티켓의 모범을 보여줬고

언제나 근면 성실한 모습에

팀원들과 함께 배려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휴직 무사히 마치고 회사에 복귀하는

건강한 모습 기대할게요.

고생이 많았습니다.




하마터면 퇴사할 뻔했다. 이 글을 못 보고.

몇 년 만에 접속하여 위의 글을 발견했다. 학창 시절 모범생으로 살면서 시키는 것 잘하고 하라는 대로 군소리 없이 하던 아이였다. 직장에서도 같았다. 그래도 머리가 굵어지니 내적 갈등이 본격적으로 격화되었었다. 내 고집이 생기고, 소신이 생기니 불합리하고 거북한 것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불평하고 트집 잡고 싶은 것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더불어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눈길과 손길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휴직에 들어섰었다. 그런 내적 혼란과는 별개로 당시의 팀장님은 내가 만났던 모든 상사를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명확한 분이셨다. 최대한 가정과 직장일을 병행할 수 있게 퇴근하면서 인사하지 말고 육아 단축 근무에 따른 퇴근 시간에 맞춰서 칼퇴근을 하라고 부추기셨다.


휴직 후에도 나를 불러 밥을 사주셨었다. 그것도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편하게 생각하던 직원들과 아기자기하게 모임을 만들어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었다. 계속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 주말 장터에서도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고 또 남편과도 인연이 닿아서 함께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런 팀장님께서 내게 일종의 '덕담 레터'를 남기신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못 보고 살아갈 뻔했다. 회사로 돌아가야 할지, 개인의 자유로운 업을 선택해야 할지, 정말로 머리털 빠지게 고민했었다. 인생의 큰 결정을 내리려니 정말 점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가며 길거리에 있는 점쟁이의 천막에 거의 들어갈 뻔했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번엔 다를 거라고. 회사도 바뀌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바뀌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로 딱 1주일이 되었다. 하루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그마치 일주일이나 다닌 것이다. 장하다. 어제는 일요일이라 나만의 '일요병'을 앓느라 종일 자리에 누워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꼭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늘에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삭신이 함께 아팠다.


일주일이 되니 내 책상 자리에 정이 붙었다. 커다란 모니터 두 개가 병풍처럼 둘러 쳐져있고, 서랍에는 개인 물건도 담아서 정리해두었다. 눈이 많이 나빠져서 사무실에선 항상 안경을 쓰고 생활하고 있으며, 머그컵도 하나 갔다 두고 집에 있을 때보다 물을 많이 마신다.


시간은 금방 간다. 하루가 정말로 빠르다. 새로 익힐 것도 많고, 새롭게 정을 나눌 사람도 많다. 내가 없었던 시간 동안 역사가 쌓여있었다. 나는 그 역사를 따라잡느라 하루가 빠듯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급하게 가지 않으려고, 마음에 두근두근한 고동이 칠 때마다 일부러 심호흡을 한다. 스트레칭도 하고 나에게 주문도 건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어차피 이 길은 '마이 웨이'일뿐이라고.


예전엔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야단도 아니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 혹은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까지도 '그 사람 썩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악평은 전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안 하고 싶은 일, 안 해도 되는 일까지 웃으면서 하다가 속이 남아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마음을 잘 살피며, 내 능력을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조금 거리를 두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운영해나가고 있다.


퇴근해와서는 딸내미와 시금치나물을 함께 만들어먹었다. 예전에는 곧잘 곤죽이 되어버리곤 했는데 오늘은 성공이었다. 다음에는 아이들 도시락 싸는 이야기, 아침과 저녁밥 해 먹는 이야기, 설거지하는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아이들이 잠을 안 자고 내가 좋아하는 '라라랜드 ost'를 부른다. 그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엄마가 화를 내지 않을 거란 걸 귀신같이 알고 있다. 이제 아이들 재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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