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상의 여론을 살펴보면 유독 한약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리는 분들이 많다. 잘 모르겠다, 너무 비싸다, 잘 먹지 않는다, 사기 아니야? 등등. 언제까지나 인터넷 여론일 뿐이고 그 이면에는 무지성적인 폄하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체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쓴다. 일상생활에서 다들 한 번쯤은 접해본 한약, 한약인지도 모르고 먹었던 한약, 그리고 한약을 먹지 말라고 부르짖던 사람들도 특히 애용하는 한약들에 대해 소개해보기로 하자.
1. 우황청심원/우황청심환
시험이나 발표 전, 긴장되는 순간을 앞두고 사람들은 '우황청심원(또는 환)'을 떠올린다. <동의보감>에서는 우황청심원의 적응증으로 '심계/정충(가슴이 뛰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 전광(불안장애, 공황발작 등의 개념을 포함하는 일종의 정신이상증)'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예로부터 긴장과 불안을 느끼는 증상에 써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연구에서는 부교감 신경계를 활성화해 자율신경계 균형을 회복하는 기전이 보고된 바 있다. 그러니 극도의 긴장과 불안을 느끼는―교감 신경이 항진된―상태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 다만 일시적으로 심장 박동을 줄이고 혈압을 낮추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심장이 약하거나 저혈압이 있는 환자는 복용을 주의해야 한다. 자세한 건 한의사와 상담하세요.
한의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우황청심원
2. 쌍화골드? 쌍화탕!
누군가는 다방에서 노른자 띄워주는 뜨끈한 차를 생각할 수도, 제약회사에서 생산되는 작은 음료병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쌍화탕은 엄연한 한약이라는 사실! 주로 몸살 기운이 있거나, 과로하여 근육통이 있거나, 기력 저하로 땀이 줄줄 흐르는 피로 증상에 쓴다. 계피와 감초, 대추 등의 한약재가 들어가 특유의 향과 달달한 맛이 특징. 여기서 잠깐, 약국에서 파는 쌍화탕과 편의점에서 파는 쌍화 음료는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마시라. 쌍화'탕'이라는 이름은 의약품에만 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의원에서 처방하는 쌍화탕은 어떤 차별점이 있냐고? 구성 약재의 양이 기본 1.5배에서 2배가량 차이가 나고, 약재 종류를 환자의 증상에 따라 다양하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각종 첨가제가 들어가 있지 않은 건 말하면 입 아프지. 게다가 한 기사에 따르면 의사들이 선호하는 감기약 중 1위를 차지한 것이 쌍화탕(21.6%)였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들도 챙겨 드실 정도니 그 효능은 말 다 했죠?
3. 안정액? 천왕보심단!
얼마 전에 TV 광고로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약, 안정액. 뭔가 하고 살펴봤더니 천왕보심단이라는 한약이었다. 실제로 불안/초조, 심장 두근거림, 불면증 등에 효능을 보이는 처방으로, 실제로는 산후우울증이나 갱년기 장애에도 처방하는 좋은 약이다. 광고에서 나온 적응증만 보면 우황청심환과 비슷해 보이나 차이가 있다. 우황청심환이 주로 급성적이고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ex. 발표 당일에 과하게 떠는 사람)에 쓴다면, 천왕보심단은 주로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증세, 기운이 없거나 체력이 소진되는 증상을 동반한 경우(ex. 평소 걱정 많고 목소리 작은 스타일)인 경우에 활용한다. 단순히 광고만 믿고 대충 사 먹었다간 효과를 보지 못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4. 은교산/구풍해독탕
은교산은 금은화와 연교를 비롯한 9가지 약재로 이루어진 처방으로, 풍열감모증―두통, 발열, 인후통, 기침 등 지금으로 말하면 감기 초기 증세―에 18세기부터 사용되던 오래된 처방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를 통해 금은화와 연교의 항염증, 항바이러스 효능이 보고된 바 있다. 실제로 목이 가렵고 깔깔할 때 복용하면 효과가 좋다. 비슷한 약으로 목이 붓는 증상이 도드라질 때 사용하는 구풍해독탕도 있다. 길경과 연교를 주 약으로 하는데, 인후염과 편도염과 같은 염증성 부종에 특효를 보인다. 알약보다는 물약으로, 입에 머금었다가 삼키는 방식이 효과가 더 좋다는 것이 한의학계의 정설. (실제 고서에 그렇게 복약지도가 되어있음) 참고로 약국 약들 중에 '생약'이라는 말이 적혀있다면 그냥 한약이라고 보시면 된다. 요즘 들어 부쩍 그 수가 늘어난 것 같기도..?
5. 헤모힘? 사물탕!
누적 판매액이 1조 7천억에 달한다는 건강기능식품 헤모X(당귀, 천궁, 백작약). 자체 개발한 척 광고를 빵빵 때리더니 알고 보니 그냥 '사물탕'이라는 한약 처방을 베껴온 거였다. 사물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귀, 천궁, 백작약, 숙지황으로 이루어진 14세기 처방으로, 허증 경향을 보이는 여성 질환―빈혈, 무월경, 생리통 등―에 조혈/보혈을 목적으로 사용되어온 근본 중의 근본 처방되시겠다. (이를 두고 자기네가 직접 발견한 조합인 것처럼 언플을 하다니 부들부들) 요즘도 사물탕 기본 골조에다가 환자의 증상에 따라 약재를 가감하여 쓰는데, 빈혈, 무월경뿐 아니라 체력 저하, 불임, 갱년기 증세에도 활용 범위가 높은 여성 처방으로 꼽힌다. 여기서 궁금증 한 가지. 해당 제품에서 빠져 있는 '숙지황'이 구성 약재 중 단가가 가장 비싸다는 건 순전히 우연일까? 아니면 원가 절감과 이익 제고를 위한 눈물겨운 노력일까?
한약이 일상생활에 자주 쓰이는 것은 반갑다. 그러나 아무나 마구잡이로 가져다 쓰는 건 조금 화난다. 특히 처방의 원리를 무시하고 A 증상에 B 약 하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심지어는 일반의약품뿐 아니라 한약 원료의 전문의약품도 그렇게 쓰이고 있다. 아 한약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동병이치, 이병동치. 동일한 진단명이라도 그 원인에 따라 다른 치료를 고민해볼 수 있고, 서로 다른 질환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약을 처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단순히 기력 회복을 위한 보약을 달라고 해도 한의사들은 소화와 수면 상태, 대변 빈도까지 물어본다. 땀을 많이 흘리는지, 꿈을 많이 꾸는지, 생리 주기는 어떤지까지 고려하기도 한다. 그게 웬 비효율이냐고, 간편할수록 돈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슨 헛수고냐고 되묻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인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우리가 인체를 보는 관점이 그런 것을.
하지만 언제까지나 고고한 입장만 취할 생각은 없다. 한의사로서 오리지널리티를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그건 한약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나 하나가 다짐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겠다 싶다. 우선 무엇이 진짜 한약인지 알리는 일부터. 앞으로도 건강기능식품회사의 침탈과, 제약회사의 수탈을 넘어, 한약이 한의사의 치료 도구로 온전히 보호받는 날까지! 한약에 관해 자세한 건 한의사와 상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