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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의 뜰 Oct 12. 2023

아버지가 나를 '고모'라고 애타게 불렀다.

[헤아림의 온도]



사람은요. 먹을 음식이 없어도 3주를 버틸 수 있고요, 마실 물이 없어도 3일을 버틸 수 있어요.

하지만 36.5도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면 단 3시간도 버티지 못해요.

영하 2도의 바닷속에 1,5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던 타이타닉 사건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지요. 결국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는 체온 유지가 중요해요.


이렇게 우리 몸이 항상 36.5도를 유지하며 건강을 지키듯이

우리 마음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서 건강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아버지 알츠하이머 증상도 더 진행되지 않고 지금처럼만 유지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 전, 추석 연휴에 있었던 일입니다.

알츠하이머 환자분들이 다 그렇듯이 저희 아버지에게도 애착물건이 있어요. 바로 자동차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78세 지금까지 무사고 운전자예요. 언제나 차를 애지중지 여기며 조심스럽고 안전하게 운전하셨지요. 문제는 알츠하이머 진단받은 후에도 아버지는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다는 거예요. 운전면허증 반납하시라는 말만 나오면 난폭한 언어와 함께 순식간에 돌변하십니다.  


하필, 왜 자동차일까.  

옷이나 음악, 가방이나 지갑 같은 소지품이었다면 안전하게 늘 지니고 계셔도 좋을 텐데, 왜 자동차에만 집착하셔서 식구들 모두 걱정을 하게 만드는지 원망했어요. 사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로 진료를 받게 된 계기가 집으로 오는 길을 여러 번 헤매게 되고, 늘 다니던 도로에서도 갑자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당황하셔서 사고 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식구들 몰래 차를 가지고 나가시면 어떡하지.'

'혼자 운전하고 가시다가 사고라도 당하시면 어떡하지.'

'혹,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 어떡하지'

엄마가 하루도 불안해서 못살겠다고 하셔서 일단 자동차는 남동생이 필요해서 가져간다고 했더니, 아들이 필요하다는데 얼른 가져가라며 자동차 키를 건네주셨어요. 알츠하이머 환자의 애착물건은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강제로 뺏으면 안 되다고 해서요.


그래서 이번에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고창 갔을 때, 지금이 기회다 싶었어요.

시골 농막 주차장에서 제 차에 아버지와 함께 타고 대화를 시작했어요.

제 차를 운전할 수 있도록 작동법을 알려드릴 테니 천천히 시운전해 보시고, 정말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시면 그땐 꼭 운전면허증 반납하고 운전을 안 하시기로 약속을 받아냈지요.


버튼을 눌러야 시동이 걸린다고 수차례 알려드려도 아버지는 계속 자동차 키 꽂는 데가 없다는 말만 하셨어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기억에는 자동차 키를 꽂아서 돌려야만 시동이 걸렸으니까요.

다이얼식 제어장치도 아무리 설명해도 잊어버리셨어요.

자신감 넘치던 아버지는 어느새 지쳐서 자동차 밖으로 나가셨지요.

저는 속으로 '아, 다행이다. 이제 운전에 대한 집착은 버리시겠구나.' 하면서 땅콩 작업을 하러 밭으로 나갔답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농막에서 나를 향해 다급하게 큰소리로 외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고모"

"고모"

"빨리 와, 고모"


아버지 타고 계신 제 차가 후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자동차 키를 차 안에 두고 나왔더니 아마 아버지가 혼자 차를 운전해 보시고 싶어서 아무거나 눌러보다가 갑자기 시동이 걸렸나 봐요.

자칫하면 경사진 밭고랑으로 빠지겠더라고요. 아찔했습니다.

무작정 달려가 시동 버튼을 눌러 전원을 껐어요.

다행히 아버지는 다친 곳 없이 무사하셨어요


그 순간 아버지 마음은 어땠을까.

6.25 전쟁 같은 무서운 기억이 떠올랐을까.

아버지가 애타게 불렀던 고모는 누구였을까.

나일까. 아니면 진짜 아버지의 고모일까.


"아버지, 저 작은 딸이에요. 작은 딸 왔어요"

"고모 아니고, 아버지 딸 현경이에요"

두려움에 떨고 계신 아버지를 안아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안정을 찾으셨는지 미안하다 미안하다 반복하셨어요




하루하루 다르게 나오는 아버지의 알츠하이머 증상들이 점점 더 낯설고 두려워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정말 모르겠어요.

마음이 무너져요.  

몸의 근육을 단단히 해야 추위를 타지 않듯이,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야 이런 상황들을 버틸 텐데요.

마음근육은 아직 멀었나 봐요.

형편없이 부족하고 말라버렸어요.


[올봄  불갑사 입구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알츠하이머 증상이 여기서 더 진행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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