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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Sep 12. 2018

여행 중, 사과 한 알의 위안

프랑스, 파리













  길을 잃었다.

  똑같은 과일 가게가 세 번째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르본 대학은 한 시간 째 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따라 쫄래쫄래,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 사이로 접어든 결과였다. 

주변의 무엇도, 누구도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때때로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내가 증발하듯 사라져도, 누구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것이라면 있었다. 과일 가게의, 초록과 노랑이 뒤섞인 차양.

  세 번쯤 만나면 이미 인연이다. 

  투박한 가게였다. 빨간 차양 아래 과일과 채소들이 박스와 바구니 안에 마구 쌓여 있었다.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쿠르베의 사과가 있었다면 저랬을까 싶은 빨간색이었다.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천사를 그려보라는 주문에,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고 답했던 화가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신들의 모습, 귀족들의 우아한 생활만이 그려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에, 쿠르베는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를 고집했다. 살롱전이 그의 그림을 거부하자, 개인 전람회장을 만들어 맞서기도 했다.

  때로는 오만하게 비추어졌을 정도의 당당함.

  그 당당함이 부러워질 때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몇 번이고 찾아왔다. 아니오, 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때. 만들어낸 웃음으로 진짜 표정을 감추어야 했을 때. 타인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을 때.

  그런 때면 사과가 먹고 싶어 졌다.

  쿠르베가 그린 정물화 중 빨간 사과 세 개를 그린 것이 있다. 정물화를 잘 그리지 않던 쿠르베가 집중적으로 정물화를 그린 시기는 그의 삶 후반, 1870년대 때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델을 고용할 돈이 없었다. 쿠브레는 사회 개혁 운동을 하다 체포당했고, 파산했다. 그럼에도 쿠르베가 그린 사과는 조금도 초라하지 않다. 반짝이며, 선명한 빛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과일 가게 안에서 나온 아저씨가 내게 사과 하나를 집어 건넸다. 내가 그 옆의 다른 품종을 가리키자, 아저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델리셔스. 넘버 원.”

  빨간 사과 하나가 내 가방 안에 들어왔다. 사과를 가방에 넣고 다시 걸었다. 빵도 하나 샀다. 골목을 헤매다 보았던 공원으로 갔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스케치북을 들고 공원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공원 한 곳에 놓인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와삭. 

  세계적으로 유명한 3대 사과가 있다.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 사과 하나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는 일화로, 세잔의 사과는 예술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세잔의 사과에 비하면 쿠르베의 사과는 유명하지 않다. 내가 그날, 앉아 사과를 깨물어 먹던 공원도 유명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날의 공원은 참 예뻤고, 사과는 맛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러한 때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장소, 보통의 행동이 반짝 마음속에 새겨지는 순간이다. 잔디밭에 앉아서 빵을 먹거나, 분수대에 기대어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보거나 했던 그런 때들이다. 음식도 그렇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먹었던 것에 특별한 시간이 깃들 때가 있다. 

  공원에서 사과와 빵을 먹는 동안, 나는 알았다. 내가 여행을 끝낸 후에도, 가끔 사과를 먹을 때면 이 시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나를 조금은 당당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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