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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Nov 21. 2018

쓰쓰난춘 플리마켓

타이완, 타이베이
















  쓰쓰난춘(SiSi Nan Cu)을 찾았을 때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플리마켓이 늘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여행을 다녀와서야 알았다. 운이 좋았던 셈이다.

  쓰쓰난춘 혹은 사사 남촌(四四南村). 정식 이름은 신의 공민 회관(信義公民會館)이다. 1940년대, 국민당 정부와 함께 중국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군인들과 가족들이 머물던 숙소였다. 

  쓰쓰난춘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들어가게 되는 건물은 전시장이다. 이곳을 통과하면 플리마켓이 열리는 광장으로 나가게 된다. 전시장에는 당시 숙소에 머물던 군인들과 그들의 사진, 당시 사용되었던 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린 아들의 옆에서 군복을 입고 서 있는 사진 속 남자는 한없이 자애로워 보였다.

  대만에는 2. 28 사건이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대만은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일본이 물러가고 중국에서 국민당, 국부군이 왔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지쳐 있던 대만 사람들은 처음에는 국부군을 환영했다. 하지만 군부군의 본성인(원래 대만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외성인(국민당과 함께 중국에서 온 사람들) 차별 대우는 대만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의 요직 대부분이 외성인으로 채워졌으며, 세금 정책과 교육 정책 등도 외성인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졌다.

  이러던 중 밀수 담배를 판매하던 대만 여성을 경찰이 과잉 단속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여성의 머리를 가격해 중상을 입혔다. 이에 주변 사람들이 항의하자 경찰은 발포했고, 학생 한 명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시위가 시작되었다. 2월 28일, 타이베이 시 전역으로 퍼진 파업과 데모는 다음날 전 섬으로 확대되었다. 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3월 2일, 타이완의 대학 교수 등 지식인들은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결성했다. 국민당은 이들과 협상하는 척하면서, 중국 본토에서 군대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3월 8일,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도착했다. 

  대 학살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흘렀다. 내가 찾아간 쓰쓰난춘은 평화로웠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음에도 번잡하거나 요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플리마켓과 전시장을 구경하거나, 잔디밭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는 전시관을 나와 플리마켓으로 향했다. 광장 한가운데 붉은 천막을 드리운 부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손으로 만든 천가방, 쿠키와 빵, 액세서리들이 눈길을 끌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 손을 잡고 있는 연인, 친구들 서넛이 모여 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까지. 플리마켓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물건만큼이나 다양했다. 

  1997년, 대만 정부는 2.28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40여 년이나 흐른 뒤였다.

  이제 쓰쓰난춘은 변했다. 쓰쓰난춘에 머무는 사람들도 바뀌었다. 그런데도 플리마켓을 둘러보는 내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건 왜일까. 잊혀간 수많은 무언가가 떠올라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부스 앞에서 멈췄다. 붉은 천막 아래에서는 빵과 커피 냄새가 났다. 부스의 주인이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직접 구운 듯한 투박한 파운드케이크가 한 조각씩 잘려 봉지에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샀다. 커피에서는 말린 꽃 향기가 났다.

  그 향기는 시간 아래 가라앉은 수많은 꽃들의 아득함과 닮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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