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때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폭식하듯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독서의 계기는 뭔가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심, 내 삶이 확 변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습니다. 평균적으로 3일에 1권 정도의 책을 완독 했었는데 50권 정도 읽었을 때쯤 문득 '현타'가 왔습니다.
막연하게 책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삶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생각보다 달라진 것 없는 제 모습에 실망했던 것입니다. 그 뒤로 아예 책과 절연하듯이 헤어지고 꽤 오랜 기간 독서를 하지 않았는데 이런 느낌을 저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천년의 독서>의 저자 미사고 요시아키는 일본 최대의 서점 '츠타야'의 인문 컨시어지입니다. 저보다 훨씬 책과 가깝게 지내는 삶을 살아온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독서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처구니없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계속 읽으면 언젠가는 머리가 좋아질 줄 알았습니다. 한데 지난 30년간 우직하게 책을 읽어도 머리가 좋아질 조짐은 전혀 나타나지 않더군요. 분명 독서량도, 독서의 질도 부족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던 중 소설가 호사카 가즈시保坂和志의 《언어의 밖으로言葉の外へ》(2012)를 만났습니다.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읽고 있는 정신의 구동驅動 그 자체이지 정보의 축적이나 검색이 아니다. 가끔 훌륭한 책을 읽으면 이 점이 새삼 떠오른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정말 무릎을 탁! 쳤습니다.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정신의 구동"이라는 문장 한 줄로 제가 독서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일말의 의심이 단번에 사라졌는데, 그야말로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독서의 효용에 대해서 정보의 축적, 어휘력 증가 등과 같이 개인의 능력을 함양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배웁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독서를 한다는 행위의 결괏값으로 '능력치 향상'을 기대할 수밖예요. 그리고 종종 "책을 1000권 읽고 삶이 변했다"와 같은 드라마틱한 체험담들이 매스컴을 타고 퍼지니 독서가 마치 확실한 성장촉진제일 것 같다는 판타지는 알게 모르게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리고 30년 넘게 책을 읽어본 미사고 요시아키의 경험에 의하면 독서를 꾸준히 한다고 해서 머리가 확 좋아지거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꾸준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매일 깨어있기 위함'입니다. 즉, 정신의 구동을 하기 위함이죠.
저는 요즘 매일 새벽에 책을 읽으면서 생각의 혈이 뚫리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소개드린 '정신의 구동'과 유사한 경험인데요.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의 생각이 담긴 책을 한 글자씩 곱씹다 보면 마치 막혔던 혈관이 시원하게 뚫리듯이 어떤 관념으로 막혀있던 생각의 혈이 뚫리는 경험을 이따금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하다 보면 종종 삶을 대하는 가치관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구분될 정도로 큰 변화가 생기기도 하죠.
나쁜 식습관을 가지면 혈관이 막히듯이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더 많은 양의 도파민을 생성하기 위해 더 짧고 더 자극적인 영상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인스턴트 콘텐츠들만 섭취를 하다 보면 언젠가 생각의 혈은 꽉 막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 책은 마치 유기농 채소처럼 생각의 혈을 뚫어주고 맑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건강식입니다.
저는 그래서 매일 새벽에 건강식으로 책을 챙겨 먹..읽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요즘 '생각 식단'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