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에 더 격한 공감을 하게 됩니다. 말 한마디 잘해서 정말로 천냥 빚을 갚거나 아니면 반대로 말 한마디를 잘못해서 천냥 빚을 지게 되는 경우를 생각보다 자주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죠.
저는 다행히도 말 한마디 잘못해서 천냥 빚을 지게 된 경험은 없고 반대로 저에게 천냥보다 더 값진 말을 누군가가 해줘서 삶의 이유를 갖게 된 경험은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 늘 문제아였습니다. 항상 성적표에는 최저등급을 의미하는 '가'(수우미양가 중 가장 낮은 등급)가 가득했고 담임 선생님의 평가 한마디에는 "주의가 산만함"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매해 학년이 올라가기 전에 받는 성적표로 "이 아이는 문제아입니다."라는 판정을 받게 돼서 인지 저는 그냥 마음 놓고 문제아가 되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누구나 아는 문제아였으니 계속해서 공부를 못하고 주의가 산만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다행히 부모님을 학교에 모셔올 만큼의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집에서 혼나는 일은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에게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학기 초에 글짓기 대회가 열려서 반강제로 전교생이 글짓기에 참여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최대한 빨리 써서 낼 수 있는 시 분야에 참여했고 후다닥 글을 써서 제출한 뒤 친구들과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담임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아, 너무 대충 써서 냈나?" 저는 왠지 이 익숙한 담임 선생님의 호출에 괜히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런데 웬걸? 담임 선생님이 대뜸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너는 글 표현을 참 재미있게 쓰는구나!" 불호령을 걱정하던 저에게 선생님은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에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써보거라" 그리고 그 대회에서 저는 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수상 소식을 미리 알려줄 겸 저를 격려해 주기 위해서 따로 부르셨던 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제 인생은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로 변했습니다. 언제나 문제아였던 저에게 글쓰기의 삶이 열렸고 이때부터 저는 뭐가 됐든 꾸준히 글쓰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덩달아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된다는 마음이 생겼는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수업을 듣는 태도도 달라져서 그 해에는 학급 임원이 되기도 하고 성적표에 생애 처음으로 '수 등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만 이처럼 '말 한마디'의 힘을 경험한 줄 알았는데 최근에 읽은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담이 꽤나 많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영화감독들이 데뷔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를 인터뷰해서 엮은 책인데 각각의 감독들이 다양한 고생들을 해왔지만 그 와중에서도 꼭 등장하는 내용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해 준 '말 한마디'가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감독은 자신이 평소에 존경해 왔던 감독님이 자신에게 술자리에서 대뜸 "김 감독도 한잔해"라는 말을 해서 자신이 감독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그 뒤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경험담을, 또 어떤 감독은 자신의 데뷔작을 본 아버지가 "이 정도면 요즘 한국영화 중에서 최고 아니냐?"라고 한 말에서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감독은 조감독 시절에 실수가 잦다 보니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만두겠다고 결심을 내리고 촬영장에 갔는데 그날따라 자신을 매일 혼내던 감독님이 "오늘 수고 많았어"라며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서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싹 접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는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어릴 때 이 속담을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천냥 빚이나 갚는 말이라면 분명 심오하고 철학적이고 분량이 많은 말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오히려 그 말을 내뱉는 화자는 생각보다 큰 의미 없이, 별생각 없이 내뱉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말 자체가 큰 힘이 있다기보다는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우연히 그 말에 영향을 깊게 받을만한 상황이어서 영향력이 강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죠.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 뒤로 저는 말 한마디를 더 조심히 하게 됐습니다. 제가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더 자주 하려고 노력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준다면 힘을 뺏기보다 힘을 보태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