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집>, <잔디밭의 토끼들>, 프뢰벨
살다 보면 외로운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는데, 나만 홀로 세상으로부터 뚝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 때.
나 같은 경우, 임신을 하고 나서 아기를 키우는 동안,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일도 그만두게 되었고, 외출도 못하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시간들이었다.
아이는 귀엽고 예쁘지만, 말 못 하는 아이와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어른의 말’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다 늦은 시간에 남편이 들어오면, 사실 대화할 힘이 남아있지 않아 말을 할 의욕을 잃고 만다.
어쩌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말을 더듬기도 했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다시는 세상에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집안에만 갇혀서, 반복된 집안일과 육아만 하면서 생을 유지해 나가야만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암담했다.
이게 무서워서 중간중간 여러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모임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교육도 맡아서 해 보기도 하고… 일을 벌이면 벌일수록 내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들은 울고, 조르고, 싸고, 아팠다. 나 역시 오랜 시간 누적되어 온 피로로 체력이 좋지 않았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쉽게 힘들어지고, 실망했다.
내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예전의 일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 키우는 엄마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 생활에 그냥 뛰어들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것이 아까워서, 붙잡고 붙잡았다. 나는 미련이 아~주 긴 사람이었다.
결국 이전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화가 날 일이 없었다. 그러자니 조금 축 처졌다. 젊었을 때 공부하고 일을 하게 했던 에너지가 ‘화’였던 것 같다. 화가 떨어지니, 몸과 의욕이 노골노골하게 녹아버렸고, 무기력한 상태로 빠져 버렸다. 열광 아니면 허무. 전형적인 현대인의 심리를 고스란히 체험했다.
그러다가 내 생애 처음으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무 할 일이 없어 답답해진 나는, 시골로 거처를 옮겨 살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감각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림책 <사랑스러운 집>과 <잔디밭의 토끼들>에는 동떨어진 곳에 살게 된 외로운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사랑스러운 집>의 티파니. 엄마를 따라 이사를 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벌판 위에 이동식 주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엄마는 이런 집에 티파니를 놓고 일하러 가야 했다.
가난한 엄마는 티파니를 봐줄 사람을 구할 수도 없었다. 외딴집의 문을 걸어놓고 혼자 인형놀이를 하거나 티브이를 보며 하루하루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잔디밭의 토끼들>에서 등장하는 ‘나’는 숲 속의 작은 집에서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빠는 낮 시간 동안 잔디밭을 꾸미는 일에 열중하며 시간을 보낸다. 아이는 혼자 방에 있거나, 홀로 그물침대에 나와 바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티파니에게는 아빠가 없고, ‘나’에게는 엄마가 없다. 두 아이에게는 모두 형제가 없고, 친구가 없다. 그리고 외딴집에 머무르고 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아이들은 모두 외로운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의 눈에 띈 것이 있다. 바로 티파니에게는 ‘새싹’, ‘나’에게는 토끼.
티파니는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조그만 새싹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집 앞에 옮겨다 심고 키우기 시작했다. 새싹으로 이것이 어떤 식물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 마냥 추측으로 기대를 키워갔다. 예쁜 정원을 만들 수 있는 꽃이길…
새싹이 점점 커가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감자, 토마토, 멜론이라고 지나가던 집배원 아저씨가 일러주었다. 티파니는 실망을 했지만, 정성껏 식물을 키워냈다. 집배원 아저씨는 실망한 티파니를 위해 꽃모종을 사다 주었다. 티파니 집 마당은 채소와 꽃으로 가득했다.
‘나’는 풀벌레와 개구리 소리로 잠들기 힘든 여름밤, 잔디밭에 있는 토끼를 발견하였다. 토끼가 너무 예뻐서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하지만 아빠는 토끼가 정성스럽게 가꿔 놓은 잔디를 갉아먹는다는 이유로 토끼를 내쫓으려고 했다. ‘나’는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집 주변에 양배추를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잔디 대신 양배추를 먹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인간이 아닌, 식물과 동물이 두 소녀의 마음을 채워주고 위로해 준 것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는 게 가능한가?
예전에 집에서 화분을 키운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물도 주고 키워갔지만, 어느샌가 식물은 말라죽어 갔다.
강아지를 키웠었지만, 금세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말았다. 나는 살아있는 무언가를 돌보면 안 되는 사람이다. 안 될 뿐 아니라, 큰일 날 사람이다.
그러다 거처를 시골로 옮겨 살게 되었다. 삶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진 나머지, 새로운 환경에서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서 떠난 것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져서 삶을 바라보면, 조금은 다르게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여기에서 나는 식물과 동물을 접하게 되었다. 시골집의 마당에는 나무와 풀, 그리고 꽃이 많았다. 이 집을 거쳐간 이전 세입자들이 하나하나씩 정원을 채워 넣었던 것이다.
마당으로 올라오는 입구에는 사과나무와 매실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당가에는 장미와 개복숭아 나무가 있다. 집 뒤편에는 벚꽃나무와 버드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가 서 있다.
다년생 꽃은 계절을 맞아 폈다 졌다. 철쭉, 붓꽃, 양귀비, 끈끈이대나물, 수선화, 초롱꽃, 원추리, 채송화, 송엽국, 도라지, 백일홍, 메리골드, 라벤더...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여러 야생화가 더 있다. 특별히 가꾸지 않는데도, 계절의 리듬에 맞춰서 올라왔다 사라졌다 했다. 화분의 식물처럼 내가 키우고 죽이는 것이 아니고, 땅과 식물 자체의 힘으로 생명력을 유지했다. 나는 주위의 잡초를 뽑거나, 가끔 생각나면 물을 주는 식으로 거들기만 했을 뿐.
시골집에는 동물이 찾아오기도 했다. 동네 다른 집에서 키우는 동물인데, 남의 집이란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마을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잘 따랐다.
마당에 캠핑 의자를 펴 놓으면 어느샌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옆집 고양이. 고양이를 옆으로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으려고 하면, 손을 머리로 건드리며 자기를 쓰다듬으라고 한다. 조금 쓰다듬어주면, 궁둥이를 들이민다. 그러면 등 아래쪽을 톡톡톡 두드려줘야 한다. 내가 자기 마사지사인 줄 아는지도.
한 번은 마을 아래로 산책을 나간 적이 있었다. 혼자서 한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달려왔다. 마을에서 키우고 있는 개 '살구'였다. 살구는 그 뒤로 내 곁을 계속 맴돌았다. 자기 갈 길이 있을 텐데도, 나의 보조에 맞춰 주위를 탐색하며 힐끔힐끔 내 위치를 확인했다.
사실 산책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조금 까다로웠다. 마을 뒷산으로 연결된 입구를 찾아야 하는데, 시골 산이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보여 헷갈렸다. 그런데 살구가 자기를 쫓아오라는 듯이 길을 안내해 주었다. 똘똘하기도 하지...
다행히 살구의 인도로 마을에 잘 돌아왔다.
또 한 번은 산책로에서 살구와 함께, 두 마리 고양이인 찰스와 미미도 같이 만났다. 살구는 찰스와 미미를 어렸을 때부터 돌봤기(?) 때문에, 두 고양이가 개인 살구를 아주 잘 따라다녔다. 다른 고양이들이 찰스와 미미를 괴롭힐 때면 살구가 달려들어 보호해주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 세 식구가 함께 마을 아래로 산책을 나온 것이다. 이 세 식구는 길에서 나를 만나자 졸졸졸 마을까지 따라왔다. 아니, 내가 그들을 따라 마을로 돌아왔다.
한 명의 인간과 세 마리 동물이 줄줄이 시골길을 걷자니, 동물 '친구'라는 말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이 동물을 제 가족처럼 키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동물이 인간의 반려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확실히 외로운 느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뼈 때리는 말로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주는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서도 외로움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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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고민자가 '자신은 너무 외롭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기엔 자신이 없다.'는 고민을 토로하였다. 이에 법륜 스님은 '혼자 있기 때문이 아닌,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외롭다'라고 답을 해준다. 이렇게 마음이 닫혀있으면 남녀가 같이 있어도 외롭다. 아니,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롭다고 한다. 막상 누군가를 만나서 외로움을 해소하게 되면 또 귀찮아진다고 한다.
딱 내 마음의 상태와 같다. 혼자 살 때는 외로워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기웃기웃 거리다가, 막상 함께하는 가족이 생기니까 귀찮아진다. 헤어지면 외로워서 괴롭고, 만나면 귀찮아서 괴롭다. 결국 누군가를 만나거나 만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
반대로 '같이 있을 땐 같이 있어서 좋고, 혼자 있을 땐 혼자여서 좋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면, 외로울 일도 귀찮을 일도 없다. 가장 와닿는 말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조건 속에서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로움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이 아니다. 배고프면 짜증 나고, 사자를 보면 두렵고,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편안해지는 것은 외부 환경에 의해서 저절로 느껴지는 반응이다. 외로움은 혼자 있다는 상황이 주는 자극에 의해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단계를 더 거친다.
혼자 있는 상황에 '나는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한층 결합되어 생긴 괴로움이다. 혼자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니 힘들고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낸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그걸 만들어낸 창작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고 말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갈 것인지, 자신을 어떤 캐릭터로 만들어 갈 것인지는 작가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외로움이란 감정은 실체가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동떨어져 있을 때, 오랜 시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교류가 끊어졌을 때 느끼는 공통적인 감각은 다 허상이란 말인가. 특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허한 감정은 어쩌란 말인가. 내가 겪었던 그 수많았던 외로움 체험은 다 허구이고 상상인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다. 궁극적으로 파보면 실체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혼자 있는 상황에서 '나는 혼자야, 나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아, 나는 동떨어져 있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 따져 볼 수 있을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은 '연결하고 싶은 욕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찐하게 외롭다는 말은 찐하게 만나고 싶다는 말이다. 만나는 걸 원하는 데, 만나질 못하고 단절되어 있으니 불만족을 느끼고 괴로울 수밖에...
그런데 혼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외로워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주변에 사람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만난다'는 것이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은 꼭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존재와도 잘 연결이 되고 만난다. 내가 시골에 내려가서 한동안은 외롭다가 나중에는 꼭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자연과 연결되면서 그리 되었다.
아침마다 꽃을 들여다보고, 옆 집에서 개와 고양이들이 놀러 오면 정을 나누었다. 내가 씨앗을 뿌리면 그 자리에서 무언가가 자라났고, 물을 주면 시들했던 것이 살아났다. 잔디를 깎아주면 어수선했던 마당이 가지런해졌고, 숲길에 난 풀과 나뭇가지를 잘라내면 길이 났다. 내가 세상에 참여하고 자연이 그에 대답해 주는 긴밀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시골에서 도시로 다시 돌아온 요즘 거의 사람 만날 일이 없다. 마을에 있을 때는 그래도 마을 분들과 담소도 나누고 했는데, 여기선 그런 일조차 없다. 그런데도 좀처럼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데, 그것은 꼭 사람과 직접 만나야만 연결이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온라인을 통해서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통해서 역사상 뛰어났던 천재들의 머릿속 생각과 몸의 통찰과 연결된다. 글을 쓰면서 낯선 나와 만나기도 한다.
늘 만나는 가족 사람과 만나는 것도 유효하다. 늘 함께 있기 때문에 배경처럼 느껴졌던 가족을 매일매일 새롭고 진하게 만나면, 넓게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외롭지 않다. 심지어는 집안의 그릇과 이부자리, 집기들과도 긴밀히 만날 수 있다.
'나는 모든 것과 연결할 수 있어', '나는 세상을 만지고 느끼고 즐길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그다음 스텝에서는 외로움 대신 흥미진진함과 충족감이 따라온다.
그 흥미진진함과 충족감 또한 외로움과 같이 실체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긴 마찬가지이긴 하나,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그림책 속에 나오는 티파니와 '나'는 혼자인 상황 속에서도 결국 행복을 찾아간다. 티파니는 자신이 심은 새싹에서 굵고 탐스러운 토마토를 딴다. 집배원 아저씨는 이 가족과 가까워져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고, 엄마는 일하면서도 티파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나'는 토끼를 지키기로 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던 아빠는 혼자서 열심히 잔디밭을 지키는 대신 토끼와 잔디밭을 함께 쓰겠다는 마음을 낸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와 아빠는 함께 잔디밭을 꾸미게 된다.
어떤 한 존재와의 연결은 또 다른 연결을 만들어 낸다.
하나에 마음을 열면, 그 마음의 문을 통해 온 세상이 통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소녀들이 계속,
어디에 있든 세상과 연결되고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