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 않으면 방향을 잃을 수 있다.
대학생 때 이스라엘의 키부츠(Kibbutz, 1920년~1990년에 생겨난 집단 농장 또는 사업소)와 호주의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 1995년 3월에 호주와 체결)가 인기가 있었다. 키부츠는 고대 도시로 유명한 나라들을 여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워킹 홀리데이는 영어권 국가 중 비자 없이 장기 체류가 가능했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좋아했다. 내가 키부츠를 가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동기 형의 권유도 있었지만, 영어도 배우면서 성지순례를 할 수 있어서였다.
새벽 2:30 드디어 나는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공항 앞에는 많은 택시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손짓과 몸짓으로 고객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중 170 정도 보이는 통통한 체형의 아저씨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검은색 키파(kippa,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마음으로 유대인이 쓰는 작은 모자)를 가리키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Sabbaht Shalom(샤밧 샬롬)"
유대인에게 샤밧은 안식일로 우리의 토요일이다. 이들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부르는 이유는 유대교 전통에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칠 일째 되는 날 쉬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샬롬은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이다. 따라서 "샤밧 샬롬"은 "평안한 안식일 되세요."라는 의미로, 오랫동안 침략당하고, 핍박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의 건강과 안식을 기원하는 바람의 인사말인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을 여행하다가 "샤밧 샬롬"을 들으면, "아, 토요일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나는 기사의 마법 같은 주문에 현혹되어 그의 차에 배낭과 몸을 실었다. 그리고 배낭여행자들의 성지인 디젠코프 호스텔(Dizengoff Hostel)로 향했다.
호스텔로 가는 동안 기사는 히브리어로 된 노래를 큰 소리를 따라 부르면서, 마치 내가 영어에 능숙한 관광객으로 생각했는지 갑자기 영어로 이스라엘이 "a best city, a wonderful country"(이 단어만 알아들었다.)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 역시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표현을 모두 사용해서 원어민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Really?" "What?" "Oh, No."
"I understand." "thanks."
그렇게 재미도 없고 의미 없는 말을 서로 형식적으로 주고받는 사이 우리는 목적에 도착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기사에게 "샤밧 샬롬" 했다. 디젠코프 호스텔 앞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갑자기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하늘을 쳐다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나는 이곳에 서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곳에 왔는가?"
나는 여행에 지친 투숙객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짧은 말 한마디가 크게 들렸다.
"왓츠 업?"(What's up?)
솔직히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나의 영어 실력이 궁금하신 분은 #22를 읽어보시면 아실 수 있다.) 분명 what과 up은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이 두 단어가 문장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상 응답해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탱큐"(thank you)
순간 먼저 인사를 건넨 그 친구와 나 모두 서로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각자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대충 씻고 이층 침대에 몸을 뉘었는데, 또 다른 친구가 엄청 빠르고 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집중해서 들어보니 몇 개의 단어("코리아[Korea]", "페이머스[famous]", "태권도[teagwondo]")가 들리면서 대충 무슨 말인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 친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어나서는 "태권도"를 외치면서 초등학교 수준의 앞지르기 동작을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도 같이 "태권도"하면서 따라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 앞에서 파스타 면을 가위로 자르면 된서리를 맞는 행위로 보이는 것처럼, 내 눈앞에 펼쳐진 그 둘의 모습은 마치 오징어 다리가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각도나 절도도 없는 막춤 그 자체였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서로 자신의 동작이 맞다고 상대의 동작을 교정하라고 한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내려와 대한민국 군대에서 배운 태권도 1장의 기본 동작을 간단하게 보여주었다. 정말 간단한 동작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오 마이 갓"(Oh my God.) (이 말은 분명하게 들렸다.) 비록 그들이 떠들어 대는 말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은 태권도 종주국의 이름 모를 남자의 작은 동작 하나에 감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조금 늦잠을 잔 그다음 날 나는 걸어서 10분 정도에 위치한 KPC(Kibbutz Program Center)로 향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연결해 주는 사무소로, 230개 정도의 키부츠를 세계 각국에서 온 볼런티어(volunteer, 봉사자)에게 여러 키부츠의 위치, 특징, 현재 일하고 있는 봉사자들의 수 등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직원은 이스라엘의 북부, 중부, 남부에 있는 대표적인 키부츠의 사진과 안내문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가고 싶은 곳을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조금 고민을 한 후, 북부에서 유명한 에인 게브(Ein-Gev)를 선택했다. 이곳은 갈릴리호수(sea of Galilee) 옆에 있으면서 홀리데이인(관광 숙소)과 여러 농장을 운영하는 곳으로 이스라엘에서도 제법 큰 키부츠에 속했다. 내가 이곳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장소가 밀집되어 있어서다. 나는 회원 등록비 60불과 키부츠 보험료 60불을 지불했다. 사무실 직원과 키부츠 담당자가 잠깐의 통화를 나눈 후, 에인 게브에서 나의 방문을 허락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사무실을 나왔다.
숙소로 걸어오면서 나는 어젯밤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왜 지금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서 있는가? 나는 왜 키부츠를 가려고 하는가?"
숙소로 걸어오는 10분 동안 나는 한 가지 단어에 집중했다. 그것은 서는 것(standing)이었다. 서는 것은 움직임의 목표와 의미를 재고하는 것이다. 나의 손과 발 그리고 몸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내 삶의 방향성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지 반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주변 사람이, 가족이, 학교가,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나의 삶이 아닌 그들이 원하는 삶을 나도 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삶을 위해서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펴봐야 한다.
"나는 왜 이곳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곳에 있는가?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왜 이곳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인생이 무엇이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했고, 무엇을 준비했는지를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고민과 두려움 그리고 막막함의 감정이 한순간에 설렘과 흥분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문화 그리고 낯선 환경이 기대됐다.
인생이 설레고, 기대가 되고, 도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리에서 잠시 멈춰야 한다. 그곳에서서 생각해야 한다. 왜 지금 나는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정신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내 인생의 방향성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 멈춤의 장소에서 서 있는 의미를 찾게 될 때,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의 방향성과 목표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도전이고, 성장이며,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서지 않으면 방향을 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