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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Mar 28. 2020

신이시여, 우리를 폭풍우 속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제발.....

다음날 이동제한령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우리가 향한 곳은 중고차 판매점이었다. 첫째가 태어날 때 구입했던 차를 팔기로 했다. 9인승 폭스 박겐이다. 6년 반 동안 16만 킬로를 달렸다. 함께 참 많은 곳을 여행했다.


올해 3월엔 남편이, 여름엔 아이들과 내가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올 때면 항상 짐이 한가득인데, 많은 짐을 싣기에 이 만한 녀석이 없어 올해까지는 차를 쓰고 내년에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국행의 불가능이 확실해지면서 차를 팔기로 했다.


폐차만 아니길 바랄 만큼 혹사시킨 녀석이었는데 마지막까지 제 몫을 다했다. 한 푼이 아쉬운 시기에 예상치 못한 (금액을 떠나) 너무나 소중한 현금을 안겨주며 아름다운 작별을 했다.

마지막 서류 작성을 위해 중고차 판매점에서 2킬로 떨어진 회계 사무실로 향했다. 처음 가본 동네였다. 낡고 지저분했다. 아직 이동제 한령이 떨어지기 전이었지만 휴교령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잔뜩 모여 놀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선 보기 힘든) 딱 봐도 좀.... 노는 애들 같았다. 서류 작성을 끝냈을 땐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휴교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온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때마침 맥도널드가 보였다.

내가 잠깐 들어가 햄버거만 사서 나오기로 했다. 그 날 맥도널드에 들어서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발 디딜 곳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학교 못 간 청소년들, 아린이집에 아이를 보내지 못한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 동네 백수 아저씨들까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해 전국의 학교를 닫아 버린 판국에 당황스러울 만큼 잔뜩 모여있었다. 해피밀 두 개를 받아 들고 차에 오르며 남편에게 말했다.


이건 학교가 아니라,
맥도널드를 닫아야겠어!


다음날 이탈리아 전국에 이동제한령이 떨어졌다. 맥도널드는 까맣게 잊은 채 우리는 하루만 늦었어도 차를 팔지 못했을 거라고 얼마나 운이 좋은가 기뻐했다.




요 며칠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년 전이다. 일주일에 한 번 집 청소를 도와주는 패루 아줌마가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날은 일찍 일을 마쳐야 해서 친구와 함께 청소를 하겠다 했다. 청소가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 함께 온 친구가 수줍게 임신 5개월이라고 고백했다.


(임신 중인데 청소일을 해야만 하다니)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가슴이 답답했다. 때마침 걸음마를 땐 둘째의 육아 용품을 정리 중이었다. 처치가 난감했던 유모차 욕조 산더미의 아이 옷이 혹시나 필요할까 싶어 물었다. 그녀는 그 날 중 가장 환하게 웃으며 남편이 차를 빌릴 수 있으니 곧 연락하겠노라 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답이 없어 내가 연락을 했다. 차를 빌리지 못한 데다 이젠 몸이 너무 무거워 받으러 오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괜찮다고 우리가 가겠노라 했다.


로마에서 차를 타고 아주 오래 달렸다. 그곳엔 대중교통도 없어 보였다. 그녀가 우리 집에 올 때 (심지어 임신한 몸으로) 대체 어떻게 왔던 걸까? 도착한 동네는...... 믿기 힘들 만큼 추레했다. 이탈리아에, 로마에 이런 동네가 있었단 말인가? 60년대 드라마에서 볼 법한 재개발 전의 쓰러질듯한 아파트 단지들이 따닥따닥 서 있었다. 쓰레기 수거장도 없어 아파트 앞에 잔뜩 쓰레기봉투가 쌓여 있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많은 아파트 단지 사이에 슈퍼가 단 하나가 있었다는 거다. 게다가 가장 질이 낮은 제품을 파는 슈퍼 브랜드였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자 아들이 나갈 거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한 청년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엄마가 젊어 보였는데 뱃속의 아이가 늦둥이였나 보네.


그렇게 우리 앞에 멈춰  청년은 이탈리아에선 보기 힘든 초고도비만이었다.


이동제한령이 떨어지고 매일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와 나눈 대화가 종일 마음에 남았다.


빌 게이츠가 그러더라 시작은 바이러스지만 결국은 빈부격차의 문제가 될 거라고. 오죽하면 미국에서 휴교령을 늦게 내린 이유가 학교를 닫으면 거리로 내몰릴 아이들 때문이라고 하겠어.

어쩌면 이 기회에 가족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라.


그 날의 맥도널드가 떠올랐다. 학교는 휴교를 해버렸고 자식을 맡길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직장에도 데리고 갈 수 없고 일을 쉴 수도 더더욱 없는 부모들, 그들이 일하러 가버린 후 맥도널드에서 서성이던 아이들.


이동제한령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되었지만,

모두가 집에 머무르는 동안 위험은 가난하고 연약하고 열악하고 나이들고 교육받지 못하고 소외된 곳의 사람들에게 향하게 되었다.


우리가 매년 여름을 보내던 굽이치는 도로를 한참을 달려야지만 다다를 수 있는 지중해 절벽의 마을들, 이런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산 꼭대기 자리 잡은 중세 도시들, 수술이 가능 한 병원 하나 없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 유럽의 셀 수 없는 소도시들과 이탈리아의 의료가 열악하다고는 하나 이 정도도 갖추지 못한 수많은 나라들은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공격당할 수 밖에 없다.


지금 페루 아줌마 가족들은 그 큰 아파트 단지 내 수많은 사람들과 겨우 슈퍼 하나를 공유하며 이 상황을 버텨내고 있는 걸까?


건너집 할머니는 혼자 사신다. 하루라도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너무 걱정이 된다. 매일 큰 소리로 안부를 묻는다.


오늘은 종일 비가 쏟아졌다. 3월 말의 로마에서 말이다. 6시 티브이를 틀었다. 화면 속 최대 30만 명이 운집할 수 있는 베드로 광장은 텅 비었고 흰옷을 입은 단 한 명의 사람만이 서 있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Dio, Non lasciarci nella tempesta.

신이시어, 우리를 폭풍우 속에 내버려 두지 마세요.


교황 프란체스코


나이 든 교황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의 준비도 가족과의 인사도 장례도 없이 죽음을 맞이 하는 이들을 위해 교황 프란체스코는 예외적으로 전대사 은혜를 내렸다.  


같은 시간 이탈리아 뉴스에선 당일 확진자와 사망자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며칠 수치가 미세하게 낮아지고 있어 조심스레 가져본 희망이 무너졌다. 오늘 하루만 969명이 죽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 후 이탈리아에 발생한 최고의 사망자 숫자였다.


난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토록 잔인한 바이러스라니.
이렇게 허무한 죽음이라니.


난 멈춰버린 나의 매일만 애틋했다.  

내 가족의 일상만 안타까웠다.


미안해서 눈물이 흘렀다.

이제야 수많은 허무한 죽음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 미안해 울었다.  

이젠 두 번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일상이 너무나 애틋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발 신이시여,

우리를 폭풍우 속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이동제한령 전 날 슈퍼에 다녀오던 길에 찍은 사진이다. 우리의 몫이 너무나 당연했던 저 봄은 지금 어디에....


[저는 무신론자였으나 이제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율리안 우르반(Iulian Urban).  38세.  롬바르디아 주 코로나 바이러스 의사.

전 지난 3주 동안 여기 우리 병원에서 발생한 어둡고 악몽 같은 순간을  보고 경험할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악몽은 현실이며 더욱 거대해져 갑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병원으로 실려 왔고 그다음은 몇십 명 그리고 몇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의사가 아닙니다. 그저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죽음을 맞이하러 집으로 보내져야 하는지’를 결정해 분류하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들이 평생 이탈리아 세금을 성실히 납부했다 해도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집으로 되돌려 보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주 전까지 나와 나의 동료들은 무신론자였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신의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치료하는, 과학적인 학문을 공부한 의사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부모님이 성당에 가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9일 전,  75 세의 한 목사님이 (바이러스 확진자로) 도착했습니다. 그는 점잖은 분이었고  호흡하기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병원까지 성경을 지니고 왔습니다. 그는 주위의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러기엔 우리는 피곤함에 눌리고 낙담한 ,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끝난 상태의 의사들이었습니다.

이젠 고백해야만 하겠습니다 : 우리들은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 상황에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는 한낱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쳤고 동료 2명은 사망했으며 다른 동료들은 바이러스에 확진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끝난 지점에서 우리는 ‘신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짧은 몇 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면 주님께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강한 무신론자였던 우리가, 매일 주님께 평화를 구하고 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있다니 믿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제 75세의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3주 동안  120 명이 사망했고 우리 모두 지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위중한 상태와 우리가 처한 어려움(한계)에도 불구하고 더는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평화를 우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주님께 돌아가셨으며, 현재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마 우리도 곧 그분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나는 6일째 집에 가지 못했고 언제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나의 무용함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나의 마지막 호흡을 누군가를 돕는데 바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동료들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음에 행복합니다.

2020년 3월.
CORONAVIRUS- MEDICO IN LOMBARDIA

 ERO ATEO ADESSO CREDO NELLA PRESENZA DI DIO

Iulian Urban 38anni · Dottore in Lombardia:

"Mai negli incubi più oscuri ho immaginato che avrei potuto vedere e vivere quello che sta succedendo qui nel nostro ospedale da tre settimane. L'incubo scorre, il fiume diventa sempre più grande. All'inizio ne arrivavano alcuni, poi decine e poi centinaia e ora non siamo più dottori ma siamo diventati sorter sul nastro e decidiamo chi deve vivere e chi dovrebbe essere mandato a casa a morire, anche se tutte queste persone hanno pagato le tasse italiane per tutta la vita.
Fino a due settimane fa, io e i miei colleghi eravamo atei; era normale perché siamo medici e abbiamo imparato che la scienza esclude la presenza di Dio.
Ho sempre riso dei miei genitori che andavano in chiesa.
Nove giorni fa un pastore di 75 anni venne da noi; Era un uomo gentile, aveva gravi problemi respiratori ma aveva una Bibbia con sé e ci ha impressionato che la leggeva ai morenti e li teneva per mano.
Eravamo tutti dottori stanchi, scoraggiati, psichicamente e fisicamente finiti, quando abbiamo avuto il tempo di ascoltarlo.
Ora dobbiamo ammettere: noi come umani abbiamo raggiunto i nostri limiti di più non possiamo fare e sempre più persone muoiono ogni giorno.
E siamo sfiniti, abbiamo due colleghi che sono morti e altri sono stati contagiati.
Ci siamo resi conto che dove finisce ciò che l'uomo può fare abbiamo bisogno di Dio e abbiamo iniziato a chiedere aiuto a Lui, quando abbiamo qualche minuto libero; Parliamo tra di noi e non possiamo credere che da feroci atei siamo adesso ogni giorno alla ricerca della nostra pace, chiedendo al Signore di aiutarci a resistere in modo che possiamo prenderci cura dei malati. Ieri è morto il pastore 75enne; che fino ad oggi, nonostante avessimo avuto oltre 120 morti in 3 settimane qui e fossimo tutti sfiniti, distrutti, era riuscito, malgrado le sue condizioni e le nostre difficoltà, a portarci una PACE che non speravamo più di trovare.

Il pastore è andato dal Signore e presto lo seguiremo anche noi se continua cosi.
Non sono a casa da 6 giorni, non so quando ho mangiato l'ultima volta, e mi rendo conto della mia inutilità su questa terra e voglio dedicare il mio ultimo respiro ad aiutare gli altri. Sono felice di essere tornato a Dio mentre sono circondato dalla sofferenza e dalla morte dei miei simili.

Marzo 2020.


written by ian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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