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Comes the Sun>, the Beatles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풍경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침대 정면에는 테라스가 있었고 그는 습관처럼 아침 8시에 커튼을 걷었다. 주말이라 늦잠을 자도 될 시간이지만 일찍 일어난 건 온전히 누워있는 나를 비추는 자비 없는 햇빛 때문이었다. 11월이라 덥지는 않았지만 햇빛이 눈이 부셨다. 하여간 이 놈은 투숙객은 생각도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행동한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 얼굴을 이불에 묻은 채 엎드렸다. 이불에서 세탁한 지 얼마 안 된 세제 향이 느껴졌다. 남자 혼자 사는 주제에 침구류 세탁은 거의 매주 해서 그런지 그의 침대에서 잘 때는 항상 기분이 상쾌했다. 어느 순간 본말전도처럼 이 집에 오는 건 이 침대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 홈 가운을 입은 그는 4인용 식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낯선 광경이었다.
"뭘 쓰는 거야?"
그는 내 물음에도 펜 머리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다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무례하긴, 오래된 사이라 그런 게 익숙해서 별 상관없기도 했다. 처음에는 딱딱할 정도로 지나치게 예의바르다가도 친해지는 정도가 어느 선을 넘으면 정말이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중간이 없다.
"편지."
"누구한테?"
"전 여자친구."
"지난주에 헤어진 간호사? 왜 다시 만나 달라고 빌기라도 하는 거야?"
"그런 짓 안 하는 거 알잖아. 새삼스럽게. 걔랑은 적당한 선에서 잘 헤어졌어."
"그럼 누군데?"
"너는 모르는 사람. 오래 만나진 않았어."
그는 그러면서 테라스 너머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은 마치 바다 같았다. 요즘 바다는 더러워서 오히려 지금의 하늘이 더 바다 같다고 할까?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이 푸르기만 한 건 금새 지겨워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다시 그에게 물어봤다.
"원래 연애할 때 편지 같은 걸 썼었냐?"
"아니,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 최근이야. 그냥 무언가 쓰고 싶어 질 때가 있어. 오늘은 일어나니까 하늘이 이상하리만치 푸르더라고. 왜, 요즘 내내 비가 왔잖아. 그래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늘을 본 순간 되게 기분이 좋더라. 그걸 기록하고 싶었어. 일기 형식보단 편지가 좀 더 잘 써져서 쓰는 것뿐이야."
"흐음, 신기하네. 편지라... 너랑 영 안 어울리는데."
그는 여전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나를 얼마나 안다고?"
"또또, 그렇게 벽을 친다. 침대를 나누는 사이잖아, 우리."
"침대만, 나누는 사이겠지."
"그냥, 네 침대가 좋아. 결벽증 냄새나는 네 집도."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네."
"섞었어. 욕이랑 칭찬이랑."
그 말에 소리 없이 웃은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자주 보았던 일본제 펜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화장은 지우고 잤다. 양치는 안 해서 입이 까끌까끌했다. 바로 할까 하다가 곧 밥을 먹겠지 싶어 그냥 안 했다. 그냥 물로 가볍게 입을 헹궜다.
"옷 하나 빌릴게?"
"안 빌려준다고 해도 빌릴 거잖아."
"물론이지. 싫으면 옷을 전부 흰색으로 바꾸든지."
나는 흰색 옷을 싫어한다. 입으면 뭔가 불안해진다. 옷장 서랍에서 회색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남자인데도 마른 편이라 고무줄을 좀 조이면 나한테도 맞는다.
냉장고에서 내가 마실 오렌지 주스 한 컵을 따르고 편지를 쓰고 있는 그의 앞에 다가가 의자를 돌려 앉았다.
"그래서, 어떤 여자였어?"
"그냥, 평범한 여자였어 나보다 두 살 어리고, 공기업에 다녀서 안정적인. 그냥, 여태까지 만났던 모든 여자 중 나랑 가장 비슷했던 여자였지."
"너랑 비슷하다니, 그 여자도 쉽지 않은 인생 살았겠네."
"너보단 괜찮지 않았을까?"
항상 하던 티격태격이지만 오늘은 괜시리 욱했다. 감히 다른 여자랑 나를 비교하다니. 나는 누구든 비교 당하는 게 싫다.
"어머, 제 인생이 어때서요? 연락 오는 남자는 끊이지 않지, 결벽증 있는 친구 집은 회사랑 가까워서 술 마시다 가끔 묵기도 좋겠다."
"그래, 행복하겠네. 어제는 남자 친구랑 싸웠다 그랬나?"
"응, 아마 그대로 끝. 키스하다가 전 여친 얘기를 하다니 최악이었어. 그대로 입술을 물어뜯을 뻔했네."
"유감스러운 남자구만. 왜 그랬을까?"
"그게 이해가 가? 남자들은? 거기서 전 여친 얘기를 하는 게?"
"그냥, 말이란 게 가끔은 의식을 벗어나서 나오잖아. 본심은 아니었을 거 같은데?"
별 일이다. 이 녀석이 누군가를 이해해준다니.
"그래서, 지금 그놈 편드는 거야?"
"편들긴, 얼굴도 모르는데. 그냥 한심하지만 안타깝다는 거지."
무관심에서 나온 동정 같았다. 미워하는 감정보다 훨씬 무자비한 감정. 잔정이 없는 게 이 남자의 매력이자 결점이다.
"그 남자는 영영 끝인 거야?"
"그렇지 않을까? 내일이면 얼굴도 잊어버릴 거 같은데?"
침대 머리맡에 폰을 열었을 때 카톡창이 한가득이었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다시 잘해보자 이런 말만 한가득. 답장도 안 한 채 폰을 다시 덮었다. 차라리 말이라도 참신하게 하지 어쩌다 이런 어휘력을 딸린 남자를 만났을까? 아 맞다, 잘 생겼었지? 머리가 외모의 반만 따라가도 좋았을 걸. 편지에 한 글자씩 눌러담는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어떤 부분이 비슷했는데? 너랑?"
그는 순간 귀찮다는 표정을 짓다가 어떤 거였지 떠올리듯 고개를 위로 들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내가 평소에 생각만 하고 있던 것들이 가끔씩 그 여자 입에서 나왔어.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이야. 어? 이거는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데 목소리가 나랑 다르네? 이런 정도의 느낌으로."
"그거야 보통 사랑에 빠질 때 자주 나오는 현상 아니야? 이 사람 나랑 비슷하네? 그런 걸로.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지.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점이 하나씩 보이고 콩깍지가 벗겨지는 거지."
"그거랑 달랐어. 정말, 똑같은 말로 나오더라고. 나랑 살아온 환경도, 지역도, 심지어 외모도 많이 다른 여자의 입에서."
"흠... 혹시 운명이라고 생각한 거야?"
"약간?"
"소름 끼쳐!!!"
그 말을 들은 그는 살짝 당황한 듯 했다.
"소름 끼칠 일인가?"
"당연하지, 먹은 나이가 몇 개인데 운명 같은 걸 생각하는 거야?"
"그럼 운명이란 말은 취소하지."
"그렇게 쉽게 취소하는 거야? 운명을?"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운명이든 우연이든 인연이든. 그때 느낀 그 감정이 중요한 거지."
"너 요즘 말투는 무뚝뚝한데 말은 묘하게 감성적인 거 알아? 공대 출신 엔지니어 주제에."
심지어 대학도 좋아. 재수없게 시리.
"취업하기 좋은 스펙이지."
"그러니까, 재수 없어. 문과생 입장에선. 이과생이 그렇게 감성까지 갖추면 말이야. 이과생답게 기본 문법도 틀리고 문장의 마침표도 없이 줄줄 이어쓰란 말이야. 주술 호응 같은 건 그냥 무시해버리고."
"통계적 근거가 없는 일반화군. 하여간 문과생이란."
그가 다시 편지를 쓰려고 펜을 들었을 때 나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 질문했다.
"그렇게 괜찮은 여자랑은 왜 헤어진 거야?"
"...... 말이란 건 참 별로야. 가끔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게 입 밖으로 나오거든."
"설마... 너도냐?"
"난 좀 달라, 침대에서 전 여친 얘기를 했거든."
"더한 거잖아, 이런 미친 새끼!"
"응, 그때 들었어. 네가 하는 욕이 좀 더 찰지네."
이번엔 예상했다는 듯 반응이다.
"날 그런 침대에 재운 거야?"
"네가 멋대로 와서 잔 거지, 난 재운 적 없다."
"아!! 소름 끼쳐!!"
계속해서 소름 끼쳐하는 나를 두고 그는 귀찮은 듯 찡그린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묵묵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찡그린 표정은 약간 씁쓸하게 웃는 듯 보이기도 했는데 평소에 그가 짓는 표정과는 달랐다.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 표정은 그녀가 짓는 표정이 아니었을까 하고. 가끔 그렇게 된다. 어떤 사람을 깊게 사랑하면 그가 하는 표정이나 말투를 따라 하게 되고 그건 이윽고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된다.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물어볼까 했지만 역시나 자꾸 편지 쓰는 걸 방해하는 건 미안해서 물어보진 않았다.
그는 쓰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그러다 다시 펜을 들고 편지를 썼다. 그 모습이 마치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 같았다. 그러다 글이 막히는 듯하면 다시 펜 머리로 옆머리를 탁탁탁 쳤다.
한동안 혼자서 소름 끼쳐하다가 그것도 이내 지겨워져 파묻은 이불에서 얼굴을 들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 편지를 쓰는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절에 온 것 같았다. 집 안을 채우는 건 오직 넓은 테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편지에 쓱싹거리는 펜 소리뿐이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 좀 더 말해줘 봐."
"왜 자꾸 아까부터 방해하냐? 씻고 집에 가서 밥이나 먹어."
"그냥, 궁금하잖아. 네가 안 하던 행동을 하니까. 받은 편지도 잘 안 읽는 놈이 편지를 쓰고 앉아있는데."
"... 조금 부끄러운 얘기인데."
그는 멋쩍은 듯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군. 뭔데? 안 부끄러워해 줄게."
"가끔 아저씨 같은 말을 했어."
"뭐라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술을 주시오'라는 말을 해."
"뭐야 그게?"
"그냥 인터넷 짤 같은 걸 흉내 냈다고 생각해. 연애 초기 때 했던 말이니까 아마 대화하다가 중간에 말이 끊겨서 어색해서 나온 말일 수도 있고."
"뭐야 그게?"
"그 말투가 되게 어색하고 무뚝뚝하고 아저씨 같아서. 그렇게 말하고는 '신경 쓰지 마 그냥 가끔 혼자서 하는 말이니까' 하고 다시 그냥 걸어가잖아. 그런 모습이 사랑스럽더라고."
"뭐냐고 그게?"
"응, 이해가 안 되지? 느낌을 말로 하니까 나도 이해가 안 되네. 그냥 그러려니 해."
"부끄러워."
"..."
정말로 귀찮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지금 내 앞에서 편지를 쓰는 남자의 얼굴이 그랬다.
"부끄럽다고!!!"
"... 부탁이니까 택시비랑 밥값 줄테니까 집으로 가주지 않을래?"
"싫은데?"
나는 그렇게 시위하듯 침대에 뛰어들어가 뒹굴거렸고 그는 펜을 들고 다시 편지를 쓸까 하다가 다시 안 써지는지 펜으로 다시 옆머리를 탁탁 치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 밥이나 먹자. 갑자기 배고프다."
"서브웨이 먹자."
"...... 싫어."
"왜?"
"시켜먹어."
"살쪄."
"그래도 서브웨이 싫다. 맥도널드 가자."
'맥도날드'가 아니라 '맥도널드'다. 이 남자스러운 표현이다.
"왜 서브웨이가 싫은데?"
"걔가 좋아하던 거라서."
"부끄러워!!"
"부끄럽든 말든 서브웨이는 지금 먹기 싫어. 그러니 딴 거 먹자."
"싫어, 서브웨이."
"집 비밀번호를 바꾸든지 해야지."
"그럼 헤어진 여친인척 하면서 쉬지 않고 문 두드려야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말이지.
"여기 신축 오피스텔이라 경비 아저씨 곧 올라온다."
"아무튼 서브웨이. 참치 들어간 거. 소스는 렌치로"
"...... 알았다."
그는 포기하듯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편지를 쓰던 자리로 갔다. 무방비하게 펼쳐진 편지지를 들췄다. 담담한 문체의 편지는 이런 말로 시작했다.
아침에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봤어.
그래서 네 생각이 났어.
편지는 그저 하늘의 빛깔이 어떻다느니 비가 그친 뒤 햇빛을 보면 기분이 어떻다느니 묘사뿐인 단조로운 내용이었다. 한 장을 가득 채운 편지를 다 읽은 뒤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일기야, 절절한 러브레터구만."
생각해보니 그는 햇빛을 좋아해 이 집을 고를 때도 제일 먼저 채광을 신경 썼었다. 넓은 테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집안을 구석까지 비추었다. 한여름에도 그늘이 아닌 햇빛 한가운데를 걷는 놈이었다. 자기가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걸 상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어린아이가 옷장 깊은 곳에 숨겨둔 소중한 상자를 열어 보여주는 그런 마음. 그런 게 사랑이라는 걸 알까? 이 공대생 출신 엔지니어는? 아마 본인도 모를 것이다.
다음에는 편지 잘 써주는 남자를 만나볼까.
테이블 위에 놓은 편지지에는 햇살이 가득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