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밤>, Zion.T
희수와 헤어진 건 7년 전이다. 정확히 7년 전 오늘, 5월의 마지막 날.
오늘은 대학 동창 모임이 있었다. 정확히는 동아리에서 친했던 동기끼리의 모임으로 단톡방 인원은 열두 명, 실제로 모이는 건 7-8명 정도. 3년 전부터 매년 한 번 이상 모임을 갖고 있다.
작은 동아리로 학과 소식을 다루는 잡지를 만들었다. 전공 교수 인터뷰, 맛집 추천, 수업 소개, C.C 인터뷰 같은 잡스러운 내용뿐이었다. 찾아서 읽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기말고사 직전에 발간하는데 도서관 매점 가판대에 두면 시험공부하다가 읽기 좋은 정도라는 평을 들었다. 주 1회의 편집회의에는 제대로 회의를 하기보다는 모여서 친목질 하기 바빴다. 소식지에 다룰 내용보다 그 날 어디로 밥 먹으러 갈지가 중요했다. 지금은 없어졌다. 요즘 대학생들은 스펙 관리하기 바빠 놀고먹는 동아리보다 자소서에 한 줄 적었을 때 눈에 띌 만한 대외활동이 훨씬 의미 있는 시대니까.
희수는 같은 동아리였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2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에 기존에 동아리원이었던 친구 따라서 가입했다. 말수가 적은 편이라 분위기에는 잘 녹아들지 못했다. 혼자 다니는 모습이 자주 보였고 같이 다니는 친구도 거의 똑같았다. 반면 나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괜히 조용한 애가 있으면 먼저 말을 걸고 술자리 대화 지분의 평등화를 철저히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게 맞는 옷 같았다.
우리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았다. 왕십리에서 합정까지 동아리가 끝나고 가는 길이면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갔다. 말이 없는 편인 그녀와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섰을 때 괜히 어색함을 깨기 위해 혼자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우리가 사귄 건 특별히 무슨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수업 시간표도 겹쳤고 둘 다 왕가위 감독을 좋아했다. 어느 날 친구가 '둘은 언제 사귀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사귀어도 될라나?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백했고 그녀는 받아줬다. 거기다 그녀는 여럿이서 있을 땐 눈에 안 띄지만 둘이 얘기하다 보면 확실한 가치관 같은 게 잡혀 있어 또래와는 다른 어른스러움 같은 게 있었다. 그런 매력에 끌렸던 것도 있었다.
다 같이 모이기 좋은 곳을 고르다 보면 모임 장소는 어느새 강남이 된다. 보통 모임은 어떤 날을 딱 정하는 게 아닌 지방에 사는 친구 중 한 명이 서울로 오는 일정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모임 약속이 정해지고 되는 사람들끼리 모인다. 열두 명 중 서울에 사는 사람은 여섯 명, 네 명은 경기도에 산다. 이렇게 구성되다 보니 모임 장소는 그 중간쯤인 강남으로 된다. 강남역 10번 출구가 전국에서 유동 인구가 제일 많은 건 다 이런 이유 일려나?
글로 밥벌이하는 나는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업무와 관련된 소통도 가능하면 대면 미팅대신 전화, 메일, 톡을 선호하는 편이다. 말을 할 기회가 적어지면서 사회성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술자리도 테이블 하나 채우는 정도가 딱 좋다. 그래서 학생 시절과 달리 지금은 구석에서 술만 홀짝이면서 적당히 웃고 맞장구쳐주는, 그런 역할이었다. 학생 시절과는 사뭇 달라졌는데 지금이 훨씬 편한 걸 보면 제 자리를 찾아간 듯 싶다.
오늘은 역대급 출석률이라 왁자지껄한 1차 분위기에 적응 못 하고 구석에서 혼자 맥주만 홀짝이고 있었다. 오늘 모임은 11명, 평소보다 인원이 많은 건 안 오던 사람이 한 명 왔기 때문일 거다.
전역 후에도 동아리에 가끔 들렀지만 희수는 없었다. 나랑 헤어진 후, 다음 학기에 회계사 시험 준비를 위해 휴학한 그녀는 이내 동아리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점에는 동아리에 친한 친구도 없던 터라 안 나와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 온다고 했을 때 다른 친구 한 명은 나보고 신경 좀 써주라고 했는데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나 스스로를 챙기기 바빴다. 그녀와는 헤어진 뒤에 연락 한 번 한 적 없고. 한 번쯤 소식이 궁금했지만 그때마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리며 이내 생각을 접었다.
헤어진 건 뻔한 이유였다. 나는 입대할 때가 되었고 친구들은 희수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다. 사실 그때까지도 어떻게 할지 별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은 대체로 책임지지 못할 거면 헤어지는 게 맞다는 얘기를 했고 그게 맞는 것 같아 입대 일주일 전 희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스물 하나라는 나이를 감안해도 그때의 나란 놈은 관계 앞에서 꽤 성의 없었다.
기숙사 계단 앞이었다. 저녁으로 곱창 볶음을 먹은 뒤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면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느닷없이 한 말은 아니고 '군대 가면 보기 힘들어지겠네. 철원이나 화천 같은 곳은 아니면 좋겠다'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러게 철원 같은데 가면 춥겠네.'라고 알멩이 없는 말을 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철원이 여기서 몇 시간 걸리지?'라고 말을 했고 '역시 헤어지는 게 맞을까?'라는 말로 나는 답했다. 아까 먹었던 곱창이 좀 맵더라와 별 다름없는 어조로. 이별통보를 물음표로 하던 스물한 살의 나, 지금 눈 앞에 보이면 니킥 한 번 날리고 싶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정이 떨어진다는 어투로 말했다.
"넌 역시 알맹이가 없네."
그리고는 뒤돌아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운동화를 신었음에도 계단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하나의 커다란 그림 같아서 오랫동안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게 그녀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눈앞에 있는 475ml 생맥주 잔을 홀짝홀짝 들이키면서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공기 같이 앉아있었다. 대칭점에 있는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말을 걸 용기는 없었다. 그녀에게 나는 남보다 못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옆에 앉은 친구는 문득 이런 얘기를 했다. 수영이라고 희수를 동아리에 데려온 친구다. 희수와 사귈 때에도 셋이서 자주 만났었다.
"희수 너랑 뭔 일 있는 거야?"
"글쎄, 연락 안 하는데?"
"어, 오늘 갑자기 온다고 했거든. 한동안 연락 안 되던 애가 갑자기 연락해서 밥 먹으면서 얘기하는데 혹시 동아리 모임 있냐고 묻는 거야. 희수는 졸업하고 아예 동아리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놀랐어. 그래서 너랑도 연락하나 싶었지. 딱히 친한 사람도 없을 텐데."
의아하게 생각하다가도 별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대학 시절 친구들이 보고 싶었나 보지. 그중에 나는 포함되지 않았으리라 하는 묘한 확신 같은 것도 있었다. 오히려 내가 안 나오는 게 그녀에겐 나았으려나? 처음에 인사한 것 말고는 딱히 대화한 것도 없었다. 구석에서 홀짝거리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익숙한 듯 가운데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홉 시쯤 되었을까? 다들 2차 가자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리를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대부분 가는 분위기에서 나는 홀연히 무리에서 나와 먼저 가겠다고 했다. 인원이 많은 2차 술자리는 재미없었다. 친구들은 세상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물론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 나 말고 빠지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희수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본인의 얘기를 재밌게 하다가도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에 기분 좋은 리액션을 해주거나 더 깊은 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질문을 하곤 했다. 아싸인 나도 그녀가 가고 나면 모임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 같은 게 눈에 보였다. 우리는 무리에서 나왔다. 어쩌면 우리가 아니라 각각일지도 모르고.
그녀와 나는 나란히 역삼역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같이 가니 마치 예전에 동아리 뒤풀이 끝나고 집으로 가던 길이 생각났다. 물론 주위 풍경은 원룸 사이의 골목길에서 끝을 보려면 목이 뻐근할 정도로 뒤로 젖혀야 하는 빌딩숲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전부 선 없는 이어폰을 낀 채 걷고 있고 인도 모서리 쪽에는 전동 킥보드가 늘어져 있었다. 전부 7년 전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는 어색한 거리를 띄운 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도 그럴게 머릿속에 아까 친구들과 인사를 하며 나올 때 상황이 신경 쓰여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다들 자연스럽게 2차로 가는 분위기에서 홀연히 빠져나오려던 나의 뒤를 희수가 쫓아왔다. '어, 나도 회사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라면서 빠져나왔는데 그 광경이 참 어색했던 게 처음에는 그대로 2차로 같이 갈듯 무리에 섞였던 희수가 내가 먼저 간다고 하자 따라 나온 듯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다들 어어 하면서 그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분명 우리 둘이 빠져나간 뒤 무슨 얘기가 오고 갈 것이 분명했다. '아 맞다 쟤네 둘이 사귀었었지?' '지금도 뭐 있는 거 아냐?' '정말 안 어울리네' 뭐 그런 얘기들. 살짝 자의식 과잉인가 싶었지만 이내 무리 중의 한 명이 나한테 카톡으로 물어본 것으로 봐서 확실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빌딩 숲 사이를 걷고 있던 나는 문득 신발끈이 풀려 있던 것을 확인했다. 신발끈을 다시 묶으려 했는데 웬일인지 신발끈 묶는 방법을 까먹은 듯 손만 휘적댔다. 바보 같이 어색한 사이의 전여친 앞에서 신발끈을 휘적대는 내 모양새가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다 그런 내 옆을 전동 킥보드 한 대가 뒤에서 스치 듯 지나갔다. 뒤로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때 앞에 가던 희수가 내 쪽을 보더니 풉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거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아니 신발끈 묶고 있는데 갑자기 킥보드가 옆을 지나가서..."
스스로의 볼썽사나움에 쪽팔려서 말도 어버버 하고 있는데 희수가 다가왔다. 손을 내밀었다. 손마디에 굳은살이 박혀있었는데 아마도 계산기를 많이 두드려서 일려나?그럴리가 없지, 요즘 누가 계산기를 쓴다고...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녀의 손을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 신발끈을 묶어줬다. 희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무쌍에다 눈썹도 옅은 편이라 연한 인상이지만 콧대가 높이 뻗어있어 화장으로 인상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화장을 거의 안 한채 안경을 썼는데 오늘은 진한 화장에다 렌즈를 꼈다.
"알아, 가끔씩 그럴 때가 있지? 신발끈 묶는 방법 같은 게 기억 안 나는 그런 때."
"어, 어어."
뜻밖의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건네준 덕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걸었다. 서로 간의 간격은 아까보다 좁아졌다. 내가 사는 답십리에서는 보기도 어려운 외제차 행렬이 오가는 강남 거리를 걷고 있자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희수는 이런 곳에서 일하는구나. 그녀가 셔츠와 슬랙스 차림에 포르셰를 몰고 출근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뭐하고 지냈어?"
그녀가 물었다.
"그냥 작가 같은 걸 하고 있어. 일거리를 주는 잡지사가 몇 군데 있어서 에세이나 영화 리뷰 같은 걸 올리고 가끔씩은 짧은 소설도 쓰고. 개인적으로 공모전에도 응모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결실을 보진 못 했고."
"꽤나 담백한 근황이네. 사실 우리 만났을 때 생각하면 상당히 드라마틱한 변화인데. 네가 작가가 될 줄, 전혀 상상 못 했거든. 양복을 입고 영업팀 같은 데서 근무하면서 회식 자리에서 술잔을 돌릴 줄 할 줄 알았어."
"술자리는... 비싸서 잘 안 마셔. 언제부턴가 소주도 못 마시겠더라. 글은 겨우 밥벌이만 하는 정도야. 작가라는 말은 거창하게 들려서 아직은 민망해."
"어쩌다 글을 쓰게 된 거야?"
군대를 전역한 후 만났던 여자 친구가 예대 서사창작과에 다녔어서 옆에 있다 보니 나도 글을 쓰고 싶어 졌다, 라는 게 이유인데 그 말이 입 밖에 바로 나오진 않았다.
"군대 전역하고 만났던 여자 친구가 예대 서사창작과였거든. 항상 무언가를 쓰던 친구여서 옆에서 쓰다 보니 어느새 직업이 되어버렸어."
한 번 더 생각해보니 헤어진 지 7년 지난 전 연인에게 딱히 못할 말도 아니어서 그냥 했다. 그녀는 호오... 하면서 눈을 크게 뜨더니 놀리듯 말했다.
"만약 우리가 계속 사귀고 있었다면 나 따라서 회계사 공부를 했을 수도 있겠네? 그럼 회계사가 되거나 재무팀에 들어갔을 테고."
"뭐야, 그게."
"헤어지길 잘했네. 숫자보단 글이 어울려, 너는."
쿨한 반응을 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나와 헤어진 후 어떤 연애를 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가볍게 근황을 나누다가 역삼역에 다다랐다. 어색했을 때는 길게 느껴졌던 강남역에서 역삼역까지의 거리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한결 짧게 느껴졌다. 그렇게 역삼역에 다다랐을 땐 아쉬움이 진해졌다.
"그럼 난 가볼게."
아쉬웠지만 오히려 내가 먼저 인사했다. 그녀에게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어? 여기서 가는 거야?"
"응, 너 회사 가봐야 한다지 않았어?"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런 거. 나 회사 종로에 있어."
그녀를 그리던 이미지가 하나 깨졌다. 익숙하게 역삼역 고층 빌딩 지하주차장에 포르셰를 끌고 들어가는 모습. 나중에 들어보니 안국의 주차장도 없는 개인 회계사무소란다. 출퇴근은 지하철. 차는 포르셰 파나메라지만 1년에 5천 ㅋ
로쯤 달린다고. 그녀는 당연하단 듯이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했다. 마치 그걸 알아채지 못한 나를 놀리는 말투로.
"응? 왜 그런 거짓말을?"
"너랑 둘이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 말을 들은 내 머리 위로 물음표가 스무 개쯤 떠올랐다. 응? 뭐지? 나를? 왜? 7년이 지났는데? 그렇게 헤어졌는데? 생각은 물속에서 수영 못 하는 개구리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할게. 사실 오늘 모임에 나온 것도 네가 나온다고 해서 나온 거야. 얼마 전에 회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네 글이 실린 걸 봤거든. 단순히 이름만 같은 걸까 싶었는데 수영이한테 네가 프리랜서 작가라는 얘기를 듣고 확신이 생겼어."
출판 대행사 같은 곳에 글을 맡기고 어디에 올라가는지 모를 때도 있어서 무슨 글인지는 감이 안 왔다.
"그냥, 연말 결산 때문에 며칠 째 자정까지 야근이 이어지는 날들이었어. 잠을 일주일 내내 거의 못 자다 싶으니 문득 창문 아래를 바라보니 떨어지면 푹 잘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쳐갈 정도로 살짝 위험한 상태였다니까? 숫자는 지겨울 정도로 눈에 보다보니 문득 아무거나 글을 읽고 싶은 거야. 그러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내지를 휘적휘적 넘기다가 네 글을 봤어. 골목길 슈퍼에 사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보는 풍경에 관한 짧은 소설이었지. 신장 15cm로 보는 골목길의 세상이 15층 빌딩에서 보이는 세상보다 훨씬 재밌어 보이더라. 글의 매력이란 거, 그때 처음으로 느꼈어. 그 뒤로 네가 쓴 글을 하나씩 찾아보게 되었어. 팬이야."
기쁜 듯 웃는 희수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나는 나에게도 팬이란 존재가 있을 수 있고 그게 희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아니 의뢰라고 하는 게 더 맞겠지? 보수는 충분히 지급할 거니까."
"... 뭔데?"
"내 일상을, 네 글로 써주지 않을래?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뭐야 그게? 자서전 같은 걸 원하는 거야?"
"아니, 그냥 일기나 관찰기 같은 느낌으로 스물 아홉의 서희수라는 사람을 네 글로 그려줘. 네 글로 그린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프리랜서라면 응당 일거리가 들어오면 하이에나 같이 달려드는 게 상식이지만 그녀가 제시한 묘한 의뢰 앞에서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싶다가도 어쩌면 꽤 재밌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은 순간 눈앞의 그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밤의 빌딩 숲 한가운데 나와 정면으로 마주 선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 빛에 홀리듯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럼, 우리 가까운 카페라도 갈래? 아니면 맥주라도 한 잔 할까?"
그녀는 신이 난 듯 그렇게 말했다. 문득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라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때 말했던, '알맹이가 없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었어?"
"아 그거? 내가 그런 말도 했었나? 음... 아마 허무하게 차이는 게 싫어서 미련이라도 주려고 한 말일 거야. 지금까지 기억하는 거 보니 성공이네."
"뭐야 그게."
허탈한 듯 약간은 기쁜 듯한 웃음이 내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때 너 헤어지자고 하면서 앞니에 고춧가루 큼직한 게 꼈던 건 알아? 그런 꼴에 얼빠진 목소리로 헤어지자고 말하는 게 꼴도 보기 싫고 뭔가 스스로가 비참해져서 바로 뒤돌아 가버렸었지. 이제와 보니 귀여웠네, 그때의 나."
그렇게 말하며 얄궂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까지 내가 알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물론 나는 듣는 내내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7년이 지난 그녀의 일상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겠지. 7년이 지나서야 그때의 우리 관계가 온전히 끝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이 난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채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우리는 그렇게 역삼역에서 다시 강남역 쪽으로 나아갔다. 내리막길에 보이는 빌딩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한 걸음을 위해 필요한 건 과거를 향한 한 줌의 솔직함이다. 그러니 난 이 말부터 해야 했다.
그때는 사랑하지 않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빌딩 숲 네온사인 너머에 달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