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신비주의

<레몬>, 요네즈 켄시

by Robinsoon

어젯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보았다.


깜짝 이벤트 같은 걸 하는 게 아닌데,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코젤 맥주와 일본식 튀김을 사들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리 연락도 없이. 처음이었다. 연락 없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 건. 그리고 그 광경을 봤을 때 그녀를 향한 원망보다 자신을 향한 자책이 앞섰다. 왜 안 하던 짓을 했을까? 6월 말, 점점 더워지다가도 갑자기 비가 확 하고 쏟아지던, 그런 계절이었다.


이틀 뒤 우린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키키 키린'이란 이름의 작은 동네 카페로 앞에는 작은 천이 흐르고 있었다. 키키 키린은 일본의 유명한 여배우인데 얼마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 배우를 알게 된 건 이 카페에 놓인 한 잡지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여기 오기 전부터 그 배우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 배우가 사시였다는 걸 알려준 것도 그녀였다. 영화를 보면서 시선이 조금 멍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사시였구나. 나는 그런 걸 눈치채는 게 좀 둔한 편이었다.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는 작은 규모지만 옆에 작은 방 같은 게 있어서 공간이 분리된 것 때문인지 넓게 느껴졌다. 분리된 작은 공간은 햇빛이 잘 안 비치기에 조금 어두웠다. 앉으면 테이블에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새겨진다.


카페에 들어온 지 10분도 안 돼서 그녀가 들어섰다. 오버핏 반팔 티셔츠에 린넨 재질의 롱스커트 차림이었다. 거기에 발목까지 덮는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 안쪽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드립 커피, 나는 밀크티를 시켰다. 음료를 받아 들어설 때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 힘을 빼고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그녀의 그림자가 테이블 위에 비쳤다. 그녀는 이렇게 잠시 시간이 빌 때 핸드폰을 보거나 하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에 힘을 뺀 반듯한 자세로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입술은 가볍게 다문 채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거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멍 때리는 걸 좋아했다.


내 쪽에서 바라본 그녀는 옆모습이었다. 어떤 사람은 옆모습과 앞모습의 차이가 심한 경우가 있는데 그녀가 딱 그랬다. 앞에서 보면 둥글둥글한 인상인데 옆에서는 얼굴선이 선명하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이다. 순간 어제의 그녀가 떠올랐다. 낯선 이의 손을 잡은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했고 표정은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는 듯했다. 분명 밤이었고 그녀는 꽤 멀리 있었는데 그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있는 방이라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우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키키 키린에 대해, 카페의 특이한 구조에 대해, 슬슬 습해지는 장마철 날씨에 대해. 말은 주로 내가 하고 그녀는 가볍게 받아주는 그런 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녀가 나의 말을 받아들여주는 방식은 꽤나 성실해서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말주변이 좋지 않은 편인 나도 그녀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속내를 다 드러낸 거 같아서 가슴속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제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왜 손을 잡고 있었는지, 왜 내가 보지 못 했던 표정으로 낯선 사람의 손을 잡고 있었는지,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냥 친구라고 하면 좋을 텐데. 그녀의 손을 잡은, 여자는 그저 친구라고, 그런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 하나만 하면 되었는데 그 질문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대답은 분명 내 기대와는 다를 거라고, 그런 부정적인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쩌면 다른 이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보다 나와 함께 있을 때 볼 수 없었던 그녀의 표정이 더욱 맘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밖으로 나왔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푸른 나뭇잎에 배긴 비의 향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빗 속을 뚫는 한 줄기 빛 같았다. 그 웃음을 본 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날 그녀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녀와 있었던 마지막 날의 꿈을 꾸었다.


벌써 5년도 전의 일이다. 헤어진 뒤에 그녀를 다시 본 적은 없다. 어떤 소식도 들은 적이 없다. 그녀와 나 사이의 인간관계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라는 사람이 과연 실재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꿈같은 사람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바라 보고 있었다. 시절의 나는 그녀의 시선 끝에 담긴 무언가보다 그저 그녀의 옆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레몬>, 요네즈 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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