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그런 말이 나왔을까. 기억은 그녀와 다시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우리는 우연히 같은 시간에 같은 영화를 보았다. 나는 미리 와서 앉아 있었고 그녀는 시작시간 아슬아슬하게 왔다. 난 F열, 그녀는 C열이었다. 좌석이 있는 곳은 어두워서 그녀는 나를 못 봤겠지만 그녀는스크린 한가운데 서서 자기 자리를 찾느라 두리번 거렸기에 선명히 보였다. 마치 영화 속 인물이 스크린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극장은 서울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극장으로 광화문 인근 큰 도로에서 골목길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있는 곳이었다. 골목길은 꽤나 길어서 10분 넘게 걸어가야 했다. 보고난 영화에 따라 그 10분이 길게 느껴질 때도, 짧게 느껴질 때도 있다.
재개봉 특별전으로 <비포 선셋>을 봤다. 현실감 가득한 미련으로 시작한 둘의 만남은 여주인공 셀린을 바라보는 제시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끝났다. 영화의 여운을 담은 채 극장을 나섰다. 상영관에서 나와 로비에서 그녀를 마주친 건 마치 오래 전 있었던 일 같았다. 늦게 들어온 그녀를 본 순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 고민했다. 익숙한 듯 인사할까, 아니면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까? 그러고 보니 이 극장에서 아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이럴 때는 운에 맡겨보는 건 어떨까 싶어 만일 화장실을 다녀온 뒤에도 그녀가 극장에 있으면 말을 걸어보자, 그런 생각을 하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매표소 근처에서 포스터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를 툭하고 건드렸다. 순간 그녀는 휙 하고 뒤돌아봤다. 나는 어깨를 두드린 손을 허공에서 머뭇거리면서 어버버거렸다. 그녀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은 뒤 먼저 말을 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응, 너도 이 영화 봤나보네?"
그녀는 마치 지난 주에 만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본 적 없으니 7년은 지났을 텐데 말이다. 먼저 인사한 건 나인데 자연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쭈뼛거리고 있었다. 학생 시절도 아닌데다 예전보다는 사람 대하는게 능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녀 앞에 서자 마치 여자 앞에서 말 한 마디 못 하는 새내기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여기서 가끔 하는 기획전이 괜찮거든. 이 영화는 한 번 극장에서 보고 싶었고."
"신기하네 난 여기 처음 와 봐. 다른 극장보다 차분해서 좋네. 사람도 별로 없고. 아는 사람이 추천해줘서 한 번 와봤는데 여기서 너를 볼 줄은 몰랐어. 이런 영화 좋아했었나?"
"그냥, 언제부턴가 영화에 꽤 깊게 빠져서 이런 저런 거 가리지 않고 보는 중이야."
"흐음, 너도 꽤 변했네."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주위에서는 그리 말하는 것 같다. 그 말에 긴장이 풀려 말을 이어갔다. 더이상 새내기 시절의 내가 아니다.
"그렇지, 한 5년 만인가? 뭐하고 지내?"
"잠깐."
"왜?"
"우리 그런 뻔한 근황 묻는 건 하지 말까? 대화가 재미없어지니까. 아마 이대로 쭉 이어나가면 무슨 일 하는지, 누구 만나는지, 그런 뻔하고 지루한 얘기로 이어질 거 잖아. 나 그런 거 싫어."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대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원래 말투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다가 본인 스타일대로 이끈다. 어느 순간 대화의 주도권은 그녀의 손안에 있다. 그런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묘하게 몰입하게 된다. 대학시절 누군가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가을과 초겨울의 사이쯤 있는 날씨는 추웠지만 입김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고급스런 주택이 늘어진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은 우리가 지나갈 때 아주 잠시 그림자에 가려 어두워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걷고 있었다. 나누던 대화는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에 입이 닫혀 버린 듯 끊겨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빠른 그녀는 나보다 조금 앞에서 걸었다. 어색함이 싫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영화는 어땠어?"
"그저 그랬던 것 같아. <비포 선라이즈>를 꽤 예전에 봤는데 그게 더 좋았어 나는. 넌 어떤데?"
"둘 다 좋지만 이번 게 좀 더 좋았던 것 같아. <비포 선라이즈>는 너무 낭만적이잖아. <비포 선셋>은 현실과 낭만이 적절하게 섞였달까. 대사와 대사 사이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남녀 사이의 긴장감도 좋았어."
"대사와 대사 사이의 긴장감이라, 떠올려보니 그렇네. 나이가 든 만큼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 하니까 그런 긴장감이 생기지."
그러더니 두 발자국 앞서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표정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나 결혼했어, 3년 째고 아이는 아직 없어. 슬슬 가질까 생각 중이야."
그녀는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또렷한 발음이었다. 영화 얘기를 하다가 나온 그녀의 커밍아웃 비슷한 것에 놀라 한동안 말을 못 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지만 꽤 놀랐다. 이제 와서 무슨 감정이 남은 것도 아니지만 괜히 씁쓸했다. 뭐라 대답하지 못 하는 내 얼굴을 훑어보듯 빤히 보는 그녀는 이어서 이런 말을 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너는 나를 좋아했었어, 그렇지?"
뒤이어 나온 말도 예상치 못했지만 이 말에는 내 대답이 필요했다.
"응."
"순순히 인정해버리네?"
"지난 일이잖아. 이제 와서 새삼 부정할 일도 아니고. 알고 있었구나?"
"그냥, 시간이 지난 뒤 어렴풋이 그런 게 아닐까 싶었어. 생각나는 일도 하나 있었고."
"생각나는 일?"
꽤 잘 숨기고 있었다 생각했는데 아니였었나? 그녀는 기억을 떠올리면서 찬찬히 말했다.
"우리 알게된 지 두 달째였나? 신발을 샀었어, 파란색 체크 스니커즈. 잘 알려진 브랜드는 아니었어. 꽤 맘에 들어서 오랫동안 신고 다녔는데 이 주 뒤였나? 너도 그 신발을 신고 있더라고. 산 지 얼마 안 되서 맨들맨들했었어. 시간이 지난 뒤 떠올려보니까 다른 애들 앞에선 말만 잘 하던 애가 내 앞에서는 유난히 쭈뼛쭈뼛대기도 했고. 그래서 나를 좋아했으려나? 싶었지. 방금 전 내가 결혼했다고 말했을 때 반응을 보니 확신이 생겼고."
앞장 서서 걷던 그녀는 속도를 늦춰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나 역시 걸음 속도를 늦추었고 어느새 우리는 종종 걸음으로 골목길을 찬찬히 걷고 있었다. 마치 이 길을 걷는 시간이 좀 더 길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 신발, 너도 알아챘었구나."
"맞아? 그런 의미인 거?"
"반 정도인 것 같아. 매장에서 본 뒤 살까 말까 망설였었는데 네가 신고온 걸 본 후 다시 가서 샀어. 근데 나한테는 안 어울리더라. 얼마 안 신고 신발장에만 처박았었어. 너는 꽤 어울렸었는데."
"그러게 네가 그 신뱔을 신은 건 처음 한 번 보고 못 봤네, 나는 같은 신발을 신어서 꽤 반가웠었는데."
그 당시에는 기분 나빠할까 걱정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옆머리를 쓸어올렸다. 약지에 반지는 없었다. 궁금했지만 그 이유를 묻진 않았다. 7년 간 연락 한 번 없었다는 건 남과 같다는 거다. 사적인 걸 아무렇지 않게 물을 사이는 아니다.
"한 번 해보지 그랬어? 고백."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한적하지만 이곳도 역시 서울이라 별은 보이지 않았고 깜빡이는 건 가로등불 뿐이었다.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좋아했었어, 너를."
'좋아해'가 '좋아했었어'가 되면 입 밖에 나오는게 쉬워진다. 두 음절이 늘어났지만 말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그 말을 음미하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뒤 말했다.
"그 때는 왜 안 한 거야?"
"어떻게 하냐, 너 남친 있었잖아."
"그러네. 그 때 뭐 하나 있었지. 그래서 못 한 거야? 남친이 있어서?"
뭐 하나라니, 그 남친이 들으면 좀 서운하겠는데. 아마 ROTC였던 것 같은데.
"응."
"찌질했네."
"찌질한 거야? 보통 안 하지 않나? 남자친구 있는 여자한테 고백하는 거?"
"보통따위 알게 뭐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 못 하는 거, 그건 찌질한 거야. 상대가 어떻든, 나이가 얼마든."
그녀는 꽤 멋있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지금은 그래도 술술 나오네? 좋아한다는 말?"
"응, 넌 결혼한 지 3년이 됐잖아. 이제와서 좋아한다는 말이 너한테 큰 의미가 없을 걸 아니까. 그냥 부담이 없어서 술술 나오네. 나도 좀 신기하다."
"말주변도 꽤나 늘었네? 그 사이 여자 많이 만났나봐? 예전엔 좀 지루한 편이었는데."
그러면서 옆에 걷던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왠지 쑥스러워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랬어?"
"응, 여럿이 있을 땐 꽤 재미있었는데 이상하게 나랑 둘이 있으면 재미 없어졌었어. 처음엔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그럴리가. 스무 살이었잖아.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바보가 되기 쉬운 나이지."
골목길이 끝났고 그녀는 반대편 버스정류장에 간다고 했다. 나는 건너지 않고 버스를 타면 되지만 그녀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어 그대로 따라갔다. 횡단보도를 걷기 전, 그녀는 내 쪽을 보며 말했다. 계속 옆에서 걷다가 정면으로 바라본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나 결혼했다는 거, 거짓말이야.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어."
"뭐?"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뜬금 없는 타이밍에 이상한 말을 했다.
"만일 그렇다면 넌 지금 무슨 감정이야? 다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
벙쪄 있는 나는 초록불이 되어도 건너질 못 했다. 신호등의 초록색 불빛을 뒤로 한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군가와 결혼했다거나, 결혼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야. 진실이 어떠냐에 따라 네 마음은 바뀔까? 넌 그냥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게 스트레스인 거 아냐? 내가 누굴 만나든 결혼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거 비겁해. 그냥 하면 될 거 아냐, 고백 따위."
그녀는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둘 중 하나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건 별 이유가 없지만 거짓말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때 한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
초록불은 깜빡거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전부 다 건너지 않고 중간에 멈췄다.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을 때 그녀는 8차선 도로 한 가운데 있었다. 차들이 다니기 시작한 횡단보도 위에서 그녀는 폰을 들었다.
내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폰번호는 그대로였다. 폰은 전화가 올 때 바뀌는 초록색 배경으로 바뀌어 있었고 눈앞에 반짝이는 신호등의 붉은색은 유난히 선명해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넌다와 건너지 않는다, 전화를 받는다와 받지 않는다. 선택지는 나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바뀐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나를 다시 7년 전으로 돌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