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바라본 관람차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by Robinsoon
자정에 시작해서 새벽 두 시에 끝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인기가 제일 많은 건 '둘 중 하나는 거짓말' 이라는 코너인데 청취자가 실제 있었던 일과 꾸며낸 이야기를 하나씩 보내면 DJ가 이를 읽은 후 거짓인 이야기를 맞추는 것이다. 그 코너의 담당 작가인 나는 사연을 추리는 일을 하다가 한 사연을 발견했다.


몇 년 전이었을까요, 겨울에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삿포로행 열차에 탔습니다. 삿포로역에서 숙소인 게스트하우스까지의 길을 잘 몰라서 열차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 일본어로 길을 물어봤어요. 그런데 한국인이라네요. 뒤늦게 한켠에 놓인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붉은색 패딩을 입은 아담한 체형의 그녀는 얼굴은 하얀 편에 큰 눈이 도드라진 얼굴이었어요. 왜인지 모르지만 그 얼굴이 일본인스럽다고 느꼈습니다. 나중에 그녀로부터 들었는데 현지인으로 오해를 몇 번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혼자 여행왔고 나이는 저보다 한 살 어렸어요. 일주일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돌아가면 같이 그만둔 동료들이랑 스타트업 회사를 차린다고 했어요. 그녀와는 꽤 많은 공통점이 있었어요. 성이 같은 안 씨인 점. 12시 10분 티웨이항공 비행기. 주 목적지는 오타루와 삿포로. 영화 <러브레터>를 감명 깊게 봤다는 점까지. 첫 번째 숙박 장소는 스스키노 역 부근의 '삿포로 더 스테이'. 거기에 저는 졸업을 앞둔 취준생이었으니 퇴사 후 새 출발을 준비하는 그녀와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처음 만난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어요.


그녀는 일본어를 할 줄 몰랐지만 지도를 잘 봤고, 저는 일본어는 할 줄 알지만 길치였어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줄 수 있는 우리는 역에서 내린 뒤 자연스럽게 목적지인 게스트하우스까지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역에서 내린 저는 다시 현지인에게 길을 묻고 다행히 숙소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현지인에게 물은 대로 그녀에게 전해주자 그녀는 인터넷으로 검색한 뒤 목적지를 찾아냈어요. 저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줬다 생각했지만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서른 번도 넘게 했어요. 그녀는 해외여행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구세주라는 말도 들었어요. 홋카이도에 온 처음 날, 전 구세주가 되었어요. 마지막 날은 뭐가 될지 궁금하더라고요.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나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어요. 칭기즈칸(홋카이도 양고기 구이)에 맥주를 곁들여 마셨습니다. 공통점이 많았기에 대화는 빠른 시간 안에 꽤 깊은 화제로까지 나아갔어요. 얼마 전까지 다니던 회사에서 있었던 일, 장래에 대한 준비 뭐 그런 거까지요. 여행이라는 게 신기한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면 오히려 오래 만났던 친구보다 깊은 애기를 하기도 하잖아요. 술기운에 전에 다니던 회사가 얼마나 별로 였는지 얘기하던 그녀가 악에 뻗친 듯 열이 올랐을 무렵, 옆에 앉은 술 취한 아저씨가 귀찮게 해서 가게를 나왔습니다.


홋카이도는 눈이 많이 내리지만 공기는 서울보다 따뜻해서 춥다는 느낌이 안 들었어요. 밤산책하기 좋은 곳이에요. 숙소로 가는 길에 조심스레 남자 친구가 있는지 물어봤어요. 그녀의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노코멘트할게요' 라는 대답을 했어요. 나중에 서울에 있는 친구(여자)에게 물어봤는데 '있지만 지금은 그냥 놀고 싶다'라는 의미라네요. 카톡 닉네임은 '노코멘트녀'로 했어요.



숙소까지 한 블록 남았을 때, 빌딩 사이 너머 빛나는 관람차가 보였어요. 예전에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보았는데 건물 모양이나 간판 같은 건 한국과 비슷한 일본의 풍경에서 도시 한가운데 홀로 빛나는 관람차는 묘하게 이국적이었어요. 바로 옆에는 노코멘트라고 말한 뒤 묵묵히 앞을 걸어가는 그녀가 보였어요. 제 정수리가 제 어깨를 살짝 넘길 정도의 작은 키의 그녀가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여기서 관람차를 같이 타자고 하는 건 무리수일까? 아니면 여행자의 호기로움으로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개의 선택지가 눈 앞에 있었어요.




1


툭 내던지듯, 마치 제가 한 말이 아닌 듯 관람차를 같이 타볼까 물어봤어요. 순간 너무 작게 말해서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그녀는 방금 노코멘트라고 말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흔쾌히 오케이 했어요. 그녀의 대답은 들릴 듯 말 듯했던 제 말과는 다르게 꽤 잘 들렸던 것으로 기억해요. 마치 예정에 있었다는 듯이.


우리는 숙소에서 유턴해서 관람차로 향했어요. '노르베사'라는 백화점 안에 있던 '노리아'라는 관람차는 2 인권 에 1,200엔 이었어요. 앞서 그녀가 맥주를 샀기에 제가 냈어요. 분홍색, 빨간색, 파란색으로 변하는 야간의 관람차에 발을 들인 뒤 천천히 올라탔어요.


천천히 움직이는 관람차에서 바라본 밖의 풍경은 그냥 평범한 건물들이었지만 거기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반딧불 같아 로맨틱했던 것 같아요. 막상 좁은 공간에 둘이 있으니 어색하게 웃는 것밖에 못 하더라고요. 그러다 관람차가 제일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철골 구조너머 도시 전체가 발 아래에 놓인 그 순간 묘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녀는 어떤가 슬쩍 보았는데 시선을 옆의 창가에 고정한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가볍게 한숨을 쉬는 듯 하기도 했어요. 무언가에 지친 듯 보였죠. 저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어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그냥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죠.


관람차에서 나온 뒤 30분 정도 근처를 산책하다 숙소에 들어왔어요. 관람차를 타고 내린 뒤부터는 괜히 민망해서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이후 그녀는 지친 듯 말이 없었고 저는 어색함이 싫어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어요. 저는 긴장하면 개드립을 치곤 하는데 나중에 숙소에 돌아온 뒤 걱정했어요.



일정이 비슷한 저희는 다음 날에도 계속 같이 여행하게 되었고 그 시간은 꽤 즐거웠어요. 쌓인 눈과 일루미네이션이 어우러져 빛나는 오타루의 밤거리는 아름다웠고, 그녀의 검색으로 찾아간 스프카레 맛집도 제법 맛있었어요. 우리는 다시 못 볼 사람처럼 많은 대화를 나눴고 어쩌면 이 인연은 꽤 오래가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어요. 유치해서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어쩌면 운명이란 게 이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잠시 했어요. 여기서만 말하는 비밀이지만 저는 몽상가적인 기질이 좀 있거든요.


그 후 서울과 성남에서, 번갈아가며 만나기 시작한 우리는 연인이 되었어요. 거기까지는 좋았어요.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어느 날 팽팽한 실이 툭 하고 끊어지듯 끝나버렸어요.


같이 있을 때 그녀는 가끔 멍때리듯 시선을 허공에 두고 아무 말도 안할 때가 있어요. 그 모습은 처음 만난 날 관람차에서 본 것 같은 모습과 비슷했는데 그럴 때 마다 저는 긴장을 하게 되어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어요. 그녀는 그럴 때 마다 웃어주었고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저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죠. 하지만 어느 날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웃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그때 혼자였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했고 '습관적으로 상대방에 맞추어 주는 버릇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면 오히려 피곤하다'고도 했고 마지막으로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속이 안 좋다. 집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이어지지 않는 말의 맥락에 당황한 저를 카페에 내버려 둔 채 그녀는 그대로 가버렸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사귄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 그녀는 저를 놔둔 채 가버렸어요.


그렇게 그녀가 가버린 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연락은 더 이상 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연락오는 것도 없었어요. 그 때의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 사실 여자의 마음은 여자도 잘 몰라.'라고 했어요. 하지만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 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시간이 지난 뒤 홋카이도에 다시 왔어요. 5년 정도 지났는데 도시의 풍경은 꽤 바뀌었더라고요. 삿포로의 같은 숙소에서 묵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건물 저편의 관람차는 여전히 같은 빛깔로 빛나고 있었어요. 어쩌면 관람차를 같이 탔을 때 그 좁은 공간에 함께 있었던 탓일지 그녀와 나는 분명 무언가 통하는게 있다고 느꼈던 저와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었던 그녀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러니 상대와 나는 다른 사람이고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지만 말이에요.


저는 그저 관람차를 바라봤어요. 관람차는 어느 한 색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색이 번지듯 퍼져나갔어요.




2


물어볼까 말까 오물오물거리던 입은 결국 떼어지지 않았어요. 결국 관람차는 타지 않았죠. 여행 첫날에다 밤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라 그녀는 꽤 피곤해 보였고 무엇보다 방금 전 그녀가 했던 '노코멘트'라는 말이 계속 귀 속에서 울리는 듯했어요. 이후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노'라는 대답으로 돌아올 것 같았죠. 숙소로 들어가기 전까지 은은하게 빛나는 관람차를 바라보며 '어쩌면 관람차는 타는 게 아닌 멀리서 바라보는 게 좋을지도 몰라'라는 합리화 비슷한 걸 하고 들어갔죠. 그녀와는 여행 경로가 비슷했기에 다음 날도 동행하기로 했어요. 오히려 여기서 무리하게 들이대면 될 것도 안돼,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그날 밤 자기 전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나온 사이 잠시 마주친 한국인 일행들과 또 친해져 새벽 네 시까지 그들과 게스트하우스 로비에서 술을 마셨어요. 그러고 아침에 눈을 뜨니 열 한 시... 그녀와의 약속은 아홉 시였어요. 카톡으로 몇 번 연락한 그녀는 답이 없자 그대로 가버렸어요. 뒤늦게 제가 사과했으나 그녀는 알겠다는 짧은 말로 답했고 그 뒤의 장문의 카톡으로 서로 즐거운 시간 보내자 했어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면서 남은 여행을 즐겨야겠다 싶었죠. 그다음 날은 일 미터 넘게 쌓인 눈길을 걸어가며 사색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파칭코에 들어가서 천 엔 정도 쓰고 나왔어요. 눈 앞에 눈 밖에 없는 풍경을 그저 묵묵히 걷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어제의 인연에 잠시 머물렀어요.



어쩌면 꽤 괜찮은 인연을 어이없게 놓친 건 아닐까, 아침만 해도 쿨하게 이제 볼 일 없겠지 싶었던 사람이 갑자기 그리워지기 시작하더군요. 하루밖에 못 본 사람인데 그립다는 표현이 정확할 진 모르겠지만요. 그러다 다다른 곳이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는 골목이었어요. 우리나라처럼 플라스틱 테이블을 깔아놓는 형태가 아닌 4-5명만 앉을 수 있는 다찌 형태로 아담하게 줄지어 있는 포장마차를 하나씩 둘러보며 어디를 들어갈까 고민하던 차였어요. 문득 눈 앞에 익숙한 빨간 패딩이 보였어요. 그녀도 저를 알아본 듯 소리 없이 앗하고 서로를 바라보았죠. 그러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말없이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드렸어요. 그녀는 난처한 듯 돌아봤는데 어쩌면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노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어요. 하지만 홀로 눈길을 걸으며 쌓인 사색의 시간 덕분인지 저답지 않게 꽤 끈질기게 매달렸어요.


"제가 술 한 잔 사게 해 줘요."


그녀는 난처해 보였고 대답을 망설이는 듯 했어요. 그 모습에 의지가 꺾여 '아니면 말고요'라고 내뱉을 뻔하다가 참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어요. 가까스로 그녀로부터 예스라는 답을 들었어요. 그 대답에 기뻤지만 막상 둘이서 술을 마시자니 민망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국에서의 여행자라는 입장은 사람을 꽤 호기롭게 만들어주더군요. 포장마차 구석에 앉아 주문을 했어요. 각자 맥주 한 잔과 야키토리 한 접시씩 주문했어요. 포장마차 주인장이 야키토리를 굽는 동안 제가 제일 처음 해야 할 말을 했어요. 미안했다고. 그녀는 그 말을 들으니 다시 아침에 바람맞은 걸 떠올리며 약간의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로 왜 그랬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그날 밤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자기 전 담배 한 대 피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오는데 거나하게 취한 한국인 일행 5명이 저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어요. 일행은 총 5명이었는데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남자 넷, 여자 하나라는 인원 조합이었어요. 재밌는 점은 서로를 별명으로 소개했는데 각자 '장바', '골룸', '앙리', '충', '봉'이라는 별명이었어요. 별명의 의미를 말하자면 '장바'는 장 씨 성에 바람둥이라는 의미라네요. 얼굴이나 말솜씨로 보기에는 바람둥이가 되기에 어려워 보였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하니 무슨 매력이 있겠지 싶었어요.(이 부분을 말할 때 그녀가 조금씩 미소 짓기 시작하더라구요.) '골룸'은 그냥 얼굴을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그런데 좀 잘생긴 이미지의 골룸이라고 하면 더 정확할 것 같더라구요. 머리숱이 적은 점도 좀 닮았고(이 부분에서 그녀가 다시 웃었어요. 분위기가 슬슬 누그러지는 것 같더군요.) '앙리'는 체대 출신에다가 축구를 잘해서. 스물아홉 살인 그는 최근 스무 살 여친과 헤어졌는데 이유가 무려 삼각관계라고 하더군요. '충'은 벌레 충할 때의 충. 생김새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짝 고집스러움이 느껴지는 인상이었어요. 마지막으로 홍일점인 '봉'. 봉 잡았다 할 때의 그 봉이예요.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 속은 호구라네요. 성형을 했는지 숨을 쉴 때 코의 움직임이 좀 부자연스러웠어요. (이 부분을 말할 때 그녀가 손으로 자기 코를 쓱 훑어 내리면서 어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약간의 자신감이 담긴 그 표정은 매력적이었어요.)


쓸데없어 보이는 그 얘기를 두서없이 풀어내다 보니 어느새 분위기는 누그러졌고 그녀의 화는 풀린 듯했어요. 저는 한 편으로 조심스러움을 잊지 않은 채 대화를 풀어나갔고 그 이후의 시간은 천천히 서로에게 몰입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에게 내일부터 같이 다니자는 제안을 다시 했어요. 그녀는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내려 곰곰이 생각하더니 처음으로 혼자 하는 여행인 만큼 이번엔 혼자 다니고 싶다 했어요. 사실 첫날에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괜히 분위기 깨는 것 같아 말 못 했다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납득한 저는 쿨한 척 각자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말했어요. 그리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눈길을 푹푹히 밟아가며 걷고 있자니 그녀가 총총 걸음으로 다가와 등을 두드리더라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밥 한 끼 하자고,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돌아섰어요. 키가 160도 안 되는 아담한 편인 그녀를 붉은색 패딩이 전신을 감싸듯 했는데 점점 멀어져 가는 붉은색 점을 멍하니 바라봤어요.


그렇게 일주일 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사귀기로 했어요. 사귄 뒤에 알게 된 노코멘트의 의미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어요. 자신을 보여주는 게 느린 편인 그녀는 저의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면에 끌렸다고 했어요. 처음 만난 날은 생각지도 않게 이런저런 말을 하게 되어서 조금 부담스러웠다고 하더군요. 사귀게 되면서 닮은 점만큼 다른 점도 많다는 걸 깨달은 우리는 2년이 좀 지난 뒤 헤어졌어요. 헤어짐의 이유는 자연스러웠던 거 같아요. 서로가 차이가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어쩌면 더 맞는 사람이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때가 이 관계의 제대로 된 마침표라는 걸 알았어요.



얼마 전 홋카이도를 다시 다녀왔어요. 삿포로에서 같은 숙소에 묵으면서 돌아가는 길에 관람차가 다시 눈에 들어왔어요. 사귄 지 일 년쯤 되던 때였나 그녀에게 관람차를 탔으면 어땠을까 하고 물어봤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자기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유리창이 뻥 뚫린 좁은 공간에 있으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관람차는 그냥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도 충분히 이뻐서 좋다고 했어요. 그 말을 떠올린 저는 혼자 조용히 웃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관람차를 타볼까 하는 생각에 걸음을 그쪽으로 옮겼습니다.


한 뿌리에서 갈라진 두 줄기의 이야기 구성은 매력적이었지만 라디오 사연으로 하기엔 너무 길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방송이 끝난 뒤 DJ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사연을 건넸다. 경험이 많은 삼십 대 후반의 발라드 가수인 그는 의자에 기댄 채 정독했다. 다 읽은 그는 '연애에 있어 기회라고 생각했던게 앞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길로 이어질 수도 있고 실수라고 생각했던게 뜻밖의 새로운 길을 터주기도 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1번과 2번 중 어떤게 거짓말 같아요?' 라고 물으니 '그걸 맞추는 건 어렵지 않지만 굳이 프로그램 진행하는 것도 아닌데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두 글의 관계가 1번 글 물음표라면 2번 글이 마침표라고 보는 게 더 그럴 듯하지 않을까?' 그럴 듯 하지만 뭔 소린지 모르겠는 말을 하는게 이 DJ의 매력이다. 그러고는 이 사연에 맞춰 한 일본 노래를 알려주면서 집에 가는 길에 들어보라 했다.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Masayoshi Yamaz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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