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활은 규칙적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잠과 매일 같은 사료와 물과 장운동을 할 수 있는 모레만 있으면 크게 문제가 없다. 거기에 몸만 뉘일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된다. 지루할 것 같다고 인간은 자기 멋대로 판단하지만 그건 질풍노도의 삶에서 안정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애송이나 지껄이는 말이다. 나는 이래 봬도 꽤 많은 삶의 풍파를 겪었다. 5년 남짓 삶에서 10개의 집과 5명의 인간을 겪었으면 일리가 있지 않는가.
지금 함께하는 인간은 일단 집에 돌아오는 시간부터 불규칙적이다. 보통 저녁 7-8시 사이에 들어오지만 가끔씩 벌게진 얼굴로 술냄새를 풍기며 12시가 지난밤에 들어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집 밖을 나가지도 않고 소파에 누워 우리를 흉내 내듯 뒹굴거린다. 괘씸한 건 평소 내가 차지하던 소파의 작은 공간마저 그 냄새나는 발로 차지한다는 점이다. 쓸데없이 등치만 커가지고. 소파에서 정당한 내 지분을 주장하듯 구석에 누우면 가끔 가다 내 몸의 절반만 한 커다란 발로 나를 밀어버린다. 그런 괘씸한 인간들의 발가락을 물어버리는 동족도 있지만 품격 높은 고양이인 나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인간의 얼굴을 지긋이 본 후 캣타워 꼭대기로 간 뒤 조용히 노려본다. 둔해빠진 인간은 그런 내 모습은 신경 쓰지도 않고 정면에 있는 시커멓고 커다란 직사각형 판을 바라본다.
신기한 물건인 게 평소에는 시커멓기만 하다가 인간이 조그마한 막대기 같은 걸 누르면 여러 가지 색으로 바뀌면서 소리까지 나온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앞에 앉아 바라봤지만 10분 정도 지났을까, 지겨워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색에 눈이 피로해졌다. 인간은 그게 지겹지 않은지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누워서 바라본다. 심지어 크게 웃을 때도 있는데 세상의 모든 바보를 합친 것 같은 멍청해 보이는 웃음이다. 저 시커먼 판에서 빛을 쬐면 인간은 바보가 되나 보다.
바보를 만드는 판은 하나 더 있다. 그 네모난 판은 좀 더 조그만데 내 몸뚱아리보다 작고 인간이 두 손으로 붙잡아야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다. 오늘 인간은 소파에 누워 그 작은 판을 두 손으로 잡고 뒹굴거리고 있다.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게 그저 한없이 바보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두드리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가만히 있질 못 하는지 발을 동동 굴러서 가만히 한편에 누워있던 나는 그 발에 치여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열 받아서 얼굴이 뉘어 있는 부분으로 가 조용히 노려봤지만 인간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여간 용서할 수 없는 족속이다.
그러던 중 그 작은 네모판에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놀란 듯 바라보다가 소리가 멎을세라 귀에 갖다 댔다. 기쁜 듯한, 동시에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인간은 말을 하고 있었다.
기품 없어 보이는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처음에는 다양했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우는 소리처럼 똑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응', '어'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어떨 때는 짧고 함 있게 말하다가 가끔씩 앓는 듯이 '으으응'이라고 길게 늘여서 말한다. 자리에는 앉지 못 하고 채신머리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그러고 있었다. 그 모습도 퍽 바보 같아서 네모나고 빛이 나오는 물건은 인간을 모두 바보로 만든다라는 나의 가설은 한층 단단해졌다.
그나저나 오늘의 녀석은 확실히 달랐다. 그 네모판을 대고 말을 하는 건 가끔 있었지만 이렇게 길게 한 적은 없었으며 또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경우도 없었다. 뭐랄까, 마치 내가 캔 따는 소리에 반응하는 것과 비슷했다. 부끄럽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 평소에 기품 있는 나 역시도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흥분하게 된다. 인간은 입을 헤 거리는 표정으로 거실 한가운데를 작은 원을 그리면서 뱅글뱅글 돌고 왼손은 위아래로 휘저으면서 오른손으론 네모판을 귀에 붙이고 있었다. 네모판을 너머에는 다른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뭐라고 우는 건지 모르겠다. 그에 비해 인간은 응, 어 같은 울음소리만 반복하고 있다. 하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통에 나는 다시 캣타워 위로 올라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행동이 20분 동안 이어졌다. 인간은 움직임을 멈추고 어느새 소파에 누워서 여전히 네모판을 귀에 붙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빵 굽는 자세를 하고 바라보던 나는 지루해져서 크게 하품을 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슬슬 잠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이었다. 인간이 갑자기 응이나 어 말고 다른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 지금 보자고?
어디서? 너네 집 앞?
지금 11시 넘었는데? 아니 뭐 차 타고 가면 30분이면 되긴 한데...
아니 힘든 건 아니고... 그냥 갑작스러워서...
...
...
...
갈게! 원룸 공동현관 앞에서 연락하면 돼?
...아니야 뭘 고생은. 원래 나 밤잠 없어서 2시 넘어서 자.
저 말은 거짓말이다. 술 마실 때를 제외하곤 매번 꼬박꼬박 12시 전에 잔다. 자기는 수면리듬이 되게 중요하다고 했었나? 묻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지껄여댔었다.
한참 들고 있던 네모판을 소파에 던진 인간은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후줄근해 보이는 옷을 벗고 좀 더 멀끔해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여간 털도 없는 인간이란 족속이란. 어쩜 저리 번거롭게 옷을 매번 갈아입을까.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내 몸을 덮고 있는 자랑스러운 털을 바라봤다. 매일매일 핥아줘서 언제나 윤기가 흐른다. 검은색과 짙은 갈색의 훌륭한 조합. 역시 고양이가 낫다니까.
본인의 모습이 비치는 판을 앞에 두고 머리카락을 빗고 있었다. 빗기 전이랑 빗은 후의 차이를 전혀 모르겠지만 만족한 듯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곤 '다녀올게'하고 나갔다. 이제 좀 조용해지겠네.
새벽 두 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나는 소파가 아닌 인간의 방에 있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언제나 눕는 공간이 있다. 조금 구석진데 인간은 술에 취해 침대에 엎어져도 언제나 그 공간은 남겨둔다. 멍청한 인간치고는 유일하게 영리한 행동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인간은 침대에 누웠다. 작은 네모판은 침대 구석에 던졌다. 나가기 전에 날뛰던 텐션은 어디 갔는지 축 늘어져 있다. 혹시 죽은 걸까 싶어 앞 발로 꾹꾹 눌러봤는데 갑자기 요란하게 몸을 뒹굴거렸다. 깜짝 놀란 나는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러더니 침대 구석에 던진 그 작은 네모판을 꾹 누르더니 한참을 바라봤다.
그 작은 네모판 안에는 머리털이 짧은 두 마리의 수컷이 있었다. 하나는 지금 내 옆의 인간. 나머지 하나는 모르겠다. 그 수컷의 팔은 인간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인간의 표정은 뭔가 오묘했는데 어색한 것 같으면서도 약간은 부끄럽고 자세히 보면 기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를 억지로 끌어안은 인간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빠져나오려 했지만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오늘은 봐주기로 하고 몸에 힘을 뺐다. 이윽고 잠에 들기 전이었을까, 인간은 뭐라 중얼거렸다.
걔도 고양이면 좋을 텐데. 그럼 남자든 여자든 언제든 안아줄 수 있잖아.
나는 암컷으로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돼서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 그러니 남자니 여자니하는 인간의 말 같은 건 이해가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