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ing in the Book

<Dancing with A Stranger>, Sam Smith &

by Robinsoon

"오랜만인 것 같네요."


남자한테도 쓸데없이 달달한 주인장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반겼다. 연남동에 있는 그 가게를 지난번에 갔던 것은 에어컨 없이 잠을 잘 수 없었던 7월이었고 오늘의 나는 검은색의 롱코트 차림이었다. 자정이 지난밤의 추위는 생각보다 매서워서 따뜻한 목도리가 생각났다.


복잡한 건물의 외부 계단 밑에 위치한 바(Bar)는 처음 왔을 때는 찾기 어려웠다. 마치 좋은 가게는 찾기 어렵다는 걸 주장하듯이 말이다.


혼술을 즐기지는 않지만 예외가 있다면 책을 읽을 때다. 나이를 먹을수록 감퇴하는 집중력을 잡아주는 데 알콜은 꽤나 효과적이다. 어쩌면 카페인보다 더. 몇 년 전인가, 그 얘기를 했을 때 친한 후배는 이 가게를 추천해줬다.


검정색을 메인으로 한 인테리어와 주 전등은 없고 테이블마다 다양한 모양의 스탠드가 있다. 벽에는 주인장의 감각이 드러난 그림과 문구가 가득하다. 날씨가 추워져 그런지 테이블마다 무릎담요가 있다. 가게 안은 좀 추운 편이다. 입구 근처에는 방명록 같이 적어 놓은 포스트잇이 열과 행을 맞춰 붙여져 있다. 읽다 보면 이 곳은 나 외에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건 책이다. 자신의 취향을 숨길 생각이 없는 주인장은 다양한 책으로 가게를 가득 채웠고 그 책을 하나씩 둘러보는 것도 이 공간의 재미 중 하나다. 빌릴 수도 있다. 기간은 한 달, 보증금으로 만 원을 내고 반납할 때 돌려받는다.


메뉴판은 주기적으로 바뀐다. 메뉴의 구분은 소설/에세이/시 같은 걸로 구분해 놓았는데 도수에 따른 구분이다. 예를 들면 소설은 낮은 도수, 시는 높은 도수 뭐 그런 식. 넘기다 보면 책에서 나온 술이 메뉴에 실린 걸 볼 수 있는데 거기엔 책의 내용이 짧게 발췌되어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나보코프'의 이름을 발견하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어느 순간 주문할 생각은 않고 메뉴판을 정독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정말이지 활자 중독자에게는 천국과 같은 공간이다. 그런 메뉴판을 넘기다 보면 독특한 챕터를 발견하게 된다. '독립출판', 주인장 오리지널 메뉴다.


거기서 찾은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메뉴는 진(Gin)과 포트 와인을 메인으로 오렌지와 파인애플 주스가 조금씩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로즈메리로 향을 내었다. 가격은 15,000원, 싸진 않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지난달에 읽었던 그 책에 끌린 건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서였다. 단편집 속 2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골목길을 걷다 어떤 여자를 스쳐 지나간다. 크게 예쁘지 않았던 그녀에게 왜인지 남자는 강하게 끌렸으나 아쉽게도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다. 시간이 지난 뒤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었으면 좋았을까 생각하다 짧은 이야기를 말해주고 싶다고 느낀다. 그 이야기 속에는 매우 사랑했던 소년과 소녀가 있었으나 큰 사고를 당해 서로를 잊고 지내다 길 가다 마주쳤을 때 강하게 끌린다. 하지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는 결말로 끝난다. 이상한 이야기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100퍼센트의 여자'라는 말에 꽂혀 문득 내가 좋아하는 이 공간에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려봤다. 정면에는 술에 쓸 얼음을 깎는 주인장(남자ㅋ)과 왼쪽에는 연남동 파출소 근처에서 위스키 전문점을 운영한다는 이웃 가게 사장님(남자ㅋㅋ)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4월의 어느 맑은 날이 아니었다. 100퍼센트의 여자를 찾으려면 아직 5개월쯤 남았다. 달달했던 술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오른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상상을 한다. 거기에는 동화책을 펼쳐 놓고 필사를 하는 여자가 앉아 있다. 옅은 갈색 머리의 그녀 앞에는 위스키 한 잔이 놓여있다. 수학을 가르치는 그녀는 퇴근길에 가끔 이 곳에 들러 책을 펼쳐놓고 필사를 한다. 숫자에서 겪은 피로를 글로 푸는 걸까? 그런 그녀가 흥미로워 말을 건네고 싶지만 숨소리 조차 과하게 들릴 수 있는 이 공간에서는 힘든 일이다. 나는 포기하고 가져온 책을 읽지만 책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에 이런저런 메모를 하면서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책의 오른쪽 아래에다 뭐라고 쓴다. 그 책을 그녀 쪽에 쓱 건넨다. 그녀는 처음에 '뭐지 이 새끼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책을 본다. 나는 오른쪽 아래를 보라고 말한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적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낯선 이에 대한 의심이 한가득이다. 나는 책을 다시 내 쪽으로 가져와 메모를 한다.


'종교 권유를 할 생각은 없어요. 장기매매업자도 아니고. 간이나 신장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잘 몰라요.'


다시 책을 건네 받은 그녀는 소리 없이 킥킥 웃는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공간의 농도가 50퍼센트쯤 차오른 것 같았다. 그녀의 펜이 내 책을 향한다. 페이지를 넘겨 메모한 뒤 나에게 건넨다.


'그냥 동화책이요. 가끔 와서 받아 적어요. 차분해지거든요. 책 읽는 거 좋아하나요? 이건 무슨 책이죠?'


오밀조밀 귀여운 글씨는 그렇게 쓰여있었다. 책을 건네받으며 본 그녀의 얼굴에는 존재감이 큰 눈이 있었다.

'테드 창의 <숨>, 참신하지만 두 번 읽기는 힘들 것 같은 과학소설입니다.'


이후로 매번 페이지를 넘기며 메모하며 책을 주고받았다. 50페이지쯤 지났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은 100퍼센트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다시 시선을 왼쪽으로 돌렸을 때 눈앞의 현실은 아저씨 둘이 대화하고 있었고 점점 아저씨가 되가는 내가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 주인장과 위스키 집 아저씨는 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둘 다 글을 쓰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언제 어디서 글이 잘 써지냐 얘기를 하길래 슬쩍 끼어들었다. 주인장은 가게 안에서 조금씩 쓰는 걸 좋아하고 위스키 집 아저씨는 일할 때는 못 쓰고 쉬는 날에만 써진다고 했다. 나는 그 중간쯤이었다. 쉬는 날에 쓰지만 일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다. 그 대화도 퍽 재미있었다. 한 60%정도.


가게는 평일에 1시 반에 마감한다. 그 즈음 주인장은 메모가 적힌 판을 하나씩 돌린다. 손님들은 거기에 듣고 싶은 노래를 하나씩 적는다. 나는 'Dancing with A Stranger'를 적었다. 가게 안에 내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그 공간은 오직 나를 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어떤 낯선 사람을 생각한다.


그녀는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Dancing with A Stranger> by Sam Smith & Nor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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