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면 밤의 추위가 사라진다. 이 시기에 맡는 밤공기에는 여름의 기운이 조금 담겨있다.
우리는 교외에 있는 국도길을 걷고 있었다. 가게 간판 하나 없고 빛은 띄엄띄엄 있는 주황색 가로등과 맞은 편에 있는 주유소에서 흘러나오는게 전부였다. 한적한 밤의 국도길은 꽤 이국적이다. 국도와 가로등과 주유소의 형태는 국제 규격 같은 게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서 그녀에게 물어봤더니 모른다고 했다. 물론 알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본 건 아니다. 그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그녀의 귀로 흘러들어간 것일 뿐.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별을 보기 위해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교외에 있는 천문대로 갔다. 산 중턱에 있는 천문대는 폐쇄되어 있었다. 건물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듯 했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오는 길에 한적한 국도길 한켠에 차를 세우고 걷기로 했다.
사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지만 우리의 대화에는 서로에 대한 경계가 없었다. 그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말은 이어졌다. 이어진 말에 서로가 살을 더 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자퇴를 했다고 했다. 성적이 생각한 만큼 잘 안 나와서 그대로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인과관계가 뭔가 잘 안 맞는 거 같지만 시원한 밤공기를 맡으며 가로등 불빛 속을 걸으면서 들으면 무슨 얘기든 대충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이 자퇴생이었다는 말로 답했다. 공감을 얻기 위해 대충한 말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교실의 공기는 3년 내내 답답했으며 졸업한 뒤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크게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지만 하루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종점까지 간적이 있었다. 그때의 종점 역시 이렇게 어두운 국도길 위에 있었으며 나는 그 길을 거슬러 한참을 걸었다. 그때의 공기가 퍽 시원했음을 기억한다.
그녀는 1년 뒤 다시 학교에 돌아왔고 좋은 선생님 덕분에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할 수 있었고 대학 졸업을 앞둔 지금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퇴생 출신 선생님이라는 건 꽤 낯설지만 괜찮게 보였다. 학교 생활에 적응 못 하는 아이들도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그녀가 내 선생님이 되는 상상을 했다. 나는 학교 상담실에 앉아 그녀가 건네준 보리차를 마시며 말한다.
학교의 공기가 답답해서 자퇴를 한 번 해볼까 생각 중인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선생님은 경험자잖아요.
자유와 불안함이 동시에 따라오지.
왜요?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건 자유로워진다는 거지만 동시에 자기가 있을 곳이 명확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거든.
하지만 학교의 공기가 너무 탁해요. 저는 가끔 숨을 쉬기가 힘들다고 느껴요. 원래 비염이 심하기도 하구요.
일리 있는 말이야, 좁은 공간에 사람이 많으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기도 하고. 하지만 과연 불안함을 감당할 수 있겠어?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망설이고 있어요. 선생님은 왜 자퇴를 했는데요?
성적이 말도 안 되게 떨어졌거든. 이럴 바에는 학교생활 자체를 없던 걸로 하자, 그렇게 생각했어.
공감하기 힘든 이유네요. 일종의 결벽증 같은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삶의 중요한 결정이란 건 가끔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하는 이유로 할 수 있거든.
그런 건가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자퇴했다가 나중에 후회할까요?
일단 일주일 정도 학교를 쉬어보는 건 어때? 그리고 답답하지 않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봐. 어디든 좋아, 심야의 극장이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원 같은 곳. 거기서 네 마음에 집중해봐.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불안함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네 마음이 단단한지 말이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시간이란 게 누구에게나 필요한 시기가 오거든. 그 시기가 너에게는 조금 이르게 찾아온 걸지도 모르고.
그러면 내일부터 학교를 잠시 쉬겠습니다. 어쩌면 그대로 그만둘 수도 있구요.
잘 다녀오렴. 쉬는 동안 필요하면 언제든 말을 걸어도 돼. 물론 9시부터 6시까지. 그 이외의 시간에는 난 선생님이 아니거든.
이런 식의 상담을 해주는 선생님이 있으면 학교란 곳이 덜 답답하게 느껴졌을텐데 말이다. 어렸을 때는 답을 가르쳐주는 게 어른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자기도 답 같은 건 모른다고 하는게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그녀는 1년 동안 학교를 쉬면서 많은 영화를 봤다고 했다. TV의 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봤다고 했다. 그 때 본 영화 중 기억에 남는 걸 말했다. 그녀가 무슨 영화를 얘기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조용한 밤길에 담담히 내뱉는 목소리가 꽤 맑았던 걸로 기억한다. 시원한 밤공기가 담긴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그날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 되었을 무렵 차에 돌아갔다. 걷다가 이따금씩 서로 아무 말 않고 그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올려다 본 밤하늘에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이 가득했다.
헤어진 뒤 가끔씩 떠오르는 그녀와 관련된 기억 속에서 필름처럼 그날의 밤산책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녀는 프리지아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프리지아는 색깔별로 다섯 개의 꽃말이 있다. 흰색 프리지아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