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김정은 씨의 TMI

<우리>, 우주 히피

by Robinsoon

그녀는 자기 이름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처음 한 건 그녀가 열네 살이던 해 파리에서 애기 소리 듣는 여자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한창 유행할 때였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가고 자아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에 친구들은 그녀를 이름 대신 '애기'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수더분한 편인 그녀는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애기같이 맑은 피부를 가졌다. 그건 스물아홉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 그녀와 같은 이름의 배우가 점차 TV에 나오는 빈도가 줄어들 무렵이었다. 갑자기 로켓을 뻥뻥 쏴대는 깍두기 머리를 한 퉁퉁한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뺏어갔다. 그녀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그 해 눈이 내리는 겨울, 자기의 이름을 뺏어간 남자같이 머리를 빡빡 민 남자친구가 군대 가던 날이었다. 가끔씩 이상한 농담을 내뱉는 남친은 '너 때문에 내가 군대를 가네'라고 했다. 한 때 그 농담을 좋아했던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그녀는 갑자기 이 세상에서 그 농담이 제일 싫었다. 그 남친과는 얼마 안 가 헤어졌다. 그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그녀는 엘튼 존의 <로켓맨>을 좋아했다. 그녀가 더 스미스와 엘튼 존의 노래를 빠짐없이 듣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뺏어간 그 퉁퉁한 남자의 이름이 잊을만하면 뉴스에 나오는 올해, 서울에 사는 그녀는 스물아홉이었다.


간밤에 열어둔 창문에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9월의 아침, 7시 정각에 맞춰둔 폰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쯤 그녀는 잠에서 깼다. 그녀를 깨운 건 빗소리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창문 밖을 적시고 있었다. 창문 앞에 바로 보이는 초록색 나뭇잎에는 물방울이 맺혔다. 이른 아침에 얻은 5분은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썼다.


그녀는 아침에 비가 내리는 정경을 좋아한다



그녀는 음악을 틀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녀의 폰에는 비 오는 날에만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제목이나 가사에 비가 내리거나 아니면 그냥 비 올 때의 차분한 느낌이 나는 노래들이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지금이 세 번째 직장이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졸업하자마자 운 좋게 바로 들어간 첫 번째 직장은 규모가 크고 급여는 괜찮았지만 일이 많았다. 2년 정도 일하다 그만뒀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한 달 정도 다녀온 뒤 두 달 뒤에 들어간 회사는 작았지만 그만큼 일이 적었다. 하지만 급여가 조금 아쉬웠다. 3년 정도 일하다 그만뒀다. 그러고는 오스트리아와 캄보디아를 두 달 정도 다녀왔다.


그녀는 여행을 자주 가진 않지만 한 번 가면 오래 머무르는 걸 좋아한다.


지금 일하는 곳은 입사한 지 두 달째로 바쁘지만 퇴근시간을 딱 맞출 수 있을 정도의 업무량이었다. 회사 홈페이지의 QA를 주로 했다. 회의나 가끔씩 있는 간식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작업만 해야 한다. 요 근래는 바쁜 시기라 특히 말을 할 기회가 없이 일에 집중하느라 시선을 두 대의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서의 다른 동료들은 간단한 잡담도 주고받았지만 그녀는 말하면서 일하는 걸 잘 못했다.


그 날은 오전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러다 오후 세 시쯤이었을까, 거짓말 같이 비가 그쳤다. 잠시 기지개를 켜던 그녀는 구름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녀는 비가 그친 뒤 구름 속에 조금씩 드러나는 하늘의 푸른 빛깔을 좋아한다.


그 순간에 하늘을 본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에 새로 장만한 캡슐커피 기기에서 커피 한 잔과 빈 종이컵 하나를 들고 올라갔다.


사옥에는 괜찮은 옥상정원이 있지만 사실 옥상 입구는 하나 더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청소 아주머니와 몇번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지니 뒤쪽 옥상의 출입구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그녀는 일하다 가끔씩 숨 고르기를 위해 그곳으로 갔다. 환풍기 소리가 크게 들리는 그곳은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무엇보다 그녀 외에 사람이 없다는 점이 좋았다. 그녀는 한켠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꺼냈다. 대학 시절에 애연가였던 그녀는 지금은 하루에 한 대라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했다. 오늘의 한 대는 오후 3시 15분 맑은 하늘 옥상 아래였다. 날아오르는 담배 연기 끝에 펼쳐진 하늘을 그녀는 찬찬히 바라봤다. 5분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가져온 빈 종이컵에 꽁초를 담았다.


옥상에서 내려오기 직전 랜덤 재생해서 나온 음악은 <Across the Universe>였다. 비틀즈 버전이 아닌 아이 앰 샘이란 영화에 나온 버전이었다. 한낮의 여유로움과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선곡이 좋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퇴근 시각은 오후 5시 반으로 다행히 그녀는 업무를 그날의 분량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짐을 가방에 넣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옆에 앉은 그녀보다 2살 많은 선배가 술 한 잔 어떠냐고 물어봤다. 남편이 아기를 데리고 시댁에 간 덕분에 간만에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넉넉한 웃음을 짓는 그 선배는 오후 내내 하던 다른 직원들의 잡담에 정은씨가 끼어들지 못한 게 아직 어색해서 그런 걸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자기가 먼저 친해진 뒤 다른 동료들과 친해지게 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정은 씨도 그 선배를 마음에 들어했던 터라 퇴근 후의 술 한 잔은 거부감은 없었지만 오늘은 누군가와 함께 있기보단 차분하게 보내고 싶었다. 선배는 약간의 아쉬움을 비췄지만 상대에게 부담을 안 주려는 듯 넉넉하게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다. 정은 씨는 조만간 자신이 먼저 권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퇴근한 정은 씨는 대형서점에 갔다. 딱히 살 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책장 사이를 거닐며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는 걸 좋아한다.

요즘 서점에는 책 말고도 통로 여기저기 파는 물품들이 많아져서 번잡스러워졌다. 책이 많은 장소로는 도서관도 있지만 비염기가 있는 그녀는 책에 먼지가 쌓인 도서관은 힘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작은 독립서점은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아쉬운 부분이 조금 있어도 대형 서점 쪽이 그나마 제일 나았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도 타협이 필요하다.


극장에서 유명하지 않은 영화를 한 편 본 뒤 그녀가 들른 곳은 자주 가던 칵테일 바였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 그곳을 알게 된 것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홍대의 대로변을 걸어가던 중 10미터마다 있는 버스킹 하는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지나치게 밝은 간판의 빛이 지겨워질 무렵, 충동적으로 모르는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유유히 빛나는 작은 간판을 발견했다. 2층에 있는 가게라 입구도 찾기 어려운 그 가게를 어렵게 들어갔을 때 소란스럽던 홍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차분한 재즈바였다. 인테리어와 테이블이 전부 나무로 되어 있어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홍대에 이런 가게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 가게 주인에게 말했을 때 '나는 그저 10년 동안 여기 그대로 있었고, 홍대가 멋대로 바뀐거다' 라는 말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진토닉을 한 잔 마신 뒤 이어서 미도리사워를 시켰다. 연한 초록색의 단맛이 입에 맴돌 무렵 스피커에서는 <Lucky>와 <Fly me to the Moon>의 메들리 음악이 흘러나왔다. 기타 반주에 섞인 남녀 듀오의 목소리가 좋았다. 두 곡은 원래 한 곡이었던 것 같았다. 그 곡이 끝날 무렵이었을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그녀 옆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적당히 상대했지만 그녀는 오늘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아서 적당한 선에서 말을 끊었다. 마지막에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보기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갑자기 일어서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평소에 재즈밴드가 노래를 부르는 그곳에는 마이크 하나와 악보대가 있었다. 기타 하나를 메고 아무런 말 없이 일어선 그는 갑자기 듀스의 <여름안에서>를 기타 반주 하나로 불렀다. 계산을 마친 뒤 집에 가려던 정은씨는 입구 근처 테이블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잘 부르진 않았지만 열심히 부른다는게 느껴졌다. 꽤 괜찮았다. 그 한 곡만 부른 뒤 그 남자는 다시 바 테이블에 앉아 남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가게 입구 한 켠에 놓여진 작은 칠판에 'Open Mic'라고 적힌 걸 정은 씨는 가게 밖을 나설 때쯤에야 알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 집에 도착하기 세 정거장 앞에서 그녀는 내렸다. 차선 옆에 잘 정돈된 길에는 가로수가 촘촘히 심어져 있었다. 그 길을 걸어가던 정은 씨의 얼굴에 시원한 가을의 밤바람이 닿았다. 그러다 머리 위를 지나는 기차가 지나가는 고가철도 아래의 횡단보도에 섰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그녀는 건너지 않았다. 한 번 더 바뀌었을 때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는 밤의 고가철도 아래에서 깜빡이는 세로로 된 신호등을 좋아한다.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혼자이지만 그녀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가 있었다. 한 2년 전쯤이었을까. 불현듯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었지만 우리였을 때는 혼자가 그리웠다. 혼자와 우리, 그 사이에 딱 적당한 곳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녀는 그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연애할 때 따라오는 불순물 같은 다른 감정 말고 그저 그녀에게 마음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런 사람을 그녀는 사랑하고 싶었다. 어떨 때는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 같다가도 역시 아무데도 없는 걸까 하는 결론에 이를때는 몸과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여름의 무던한 낮의 더위가 가을의 바람으로 시원해지는 밤길을 걸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누구든 좋으니까, 자기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자기를 발견해줬으면 좋겠다고.


난 여기에 있어요


미사일을 쏠 수 없는 김정은 씨는 그렇게 마음속 작은 외침을 쏟아내었다.


스물아홉의 김정은 씨가 스물아홉 일 수 있는 시간이 세 달 좀 넘게 남았다. 가을밤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는 순간 서른이 된 내년에는 이름을 바꿔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세월 앞에 초조함은 없었지만 무언가 변화가 있었으면 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 하루가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집에는 시계도 달력도 없었다. 시간이 궁금할 땐 폰이나 노트북을 본다. 새로 산 AI 스피커도 시간을 물어보면 알려주지만 그녀의 발음이 부정확한 건지, 아니면 스피커 성능이 떨어지는 건지 두어 번 말해야 했다. 스피커가 들려준 시간은 밤 11시 41분이었다. 그녀는 스피커에게 라디오를 틀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밤 열 시에서 새벽 두 시 사이에 하는 라디오를 좋아한다.


그녀는 목소리가 좋은 유명한 발라드 가수의 라디오 프로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 DJ가 라디오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TV에서 그를 봤을 땐 라디오만큼의 솔직함과 매력이 없었으니까.


그날도 평소와 같이 과하게 TMI가 들어간 사연 속 연애담을 소재로 패널로 나온 인디가수와 수다를 떨었지만 자정이 되기 1분 전, DJ는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멘트를 내뱉었다.


오늘 생일이셨던 분들, 다들 축하해요. 괜찮은 하루였나요?


샤워를 하고 나온 정은 씨는 '네'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DJ는 라디오에서는 좀처럼 틀지 않는 일본 가수의 노래를 틀었다. <Happy Birthday>라는 노래였다. 그렇게 유명한 노래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 주위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정은 씨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 자정이 지났을 때 스물아홉의 그녀가 만 스물여덟이된 첫 번째 하루가 지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오늘 하루는 괜찮았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by 우주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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