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신분증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기어봉 아래에 놓았다. 신분증 속 사진이 좀 더 단정했다.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밤이라 해도 유난히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주민번호는 외우지 마요."
"기억력 안 좋아서 봐도 못 외워요."
"왜? 이렇게 예쁜 여자라면 뭐라도 알고 싶지 않아요? 집 주소나 주민번호라든지?"
"뭐라는 거야."
"그냥, 쿨하게 안 본다는 게 좀 아쉬워서."
이상한 여자였다.어두운 국도에서 택시 잡듯 내 차를 세운 것도 그렇고.처음 보는 사람한테 경찰도 아니고 신분증을 덥석 내미다니. 이상한 사람이다.
"제 거도 보여줄까요?"
"전 기억력 좋은데요? 슬쩍 봐도 주민번호 다 외워버릴지도 몰라요."
"아, 네. 그럼 안 보여줘도 되나요?"
"괜찮아요, 믿을 만한 거 같으니까."
"어떤 면이? 저도 낯선 남자일 텐데? 차 태워줘서?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낯선 남자는 일단 경계하고 봐야지."
"그런 말 하는 낯선 남자는 괜찮을 것 같아서."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면서 시덥잖은 대화를 이어갔다. 이 시간에 왜 국도 가운데에 있는지 묻지는 않았다. 남자 친구랑 싸워서 도로 한가운데 세우고 내린 걸까? 그러고 가버린 남자는 헤어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런 생각을 혼자 하고 있는 와중에 앞을 바라보던 여자는 말했다.
"그냥 뭐랄까, 제 신분증을 보여줬을 때 자세히 안 보려고 했을 때 안심했어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걸로 보여서."
그냥 남의 신분증 같은 걸 빤히 보는 게 거부감이 들었을 뿐이지만 여자는 제멋대로 좋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디로 데려다주면 될까요?"
"H호텔."
20분 정도 가면 있었다. 집까지 가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부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려고 차내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노래를 들었다. Belle and Sebastian 노래가 나왔다. 그녀는 음악에 취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청각에 집중하기 위해 담담히 감은 눈이 매력적이었다.
"흔치 않은 취향이네."
"알아요? 이 가수?"
"네, 알죠. 콘서트 가면 남자 거의 없던데, 여자 친구 취향인가?"
"... 네."
나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졌다.
"'전', 을 붙여야 하나요?"
"티나요?"
"응 밥그릇 빼앗긴 강아지 얼굴 같아.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는데?"
초면에 상대를 개에 비유하는 여자였다. 셰퍼드같은 대형견으로 보여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어린것 같은데 묘하게 반말이 섞여있었다. 별 상관없지만.
"몇 년 되었어요, 시기는 딱 이맘때. 낮엔 덥고 밤엔 시원한 초여름."
"괜찮은 사람이었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Belle and Sebastian을 좋아하니까. 영혼이 괜찮은 사람만 듣거든."
그런가?
"오래 만난 건 아니죠?"
바다를 끼고 낀 외곽도로를 달리던 때 창가에 오른손을 얹어 놓은 그녀는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알죠?"
"그리움보단 아쉬움이 커 보이길래."
"관상 같은 걸 보나요?"
"예리한 여자의 감 같은 거예요."
또 나왔다, 여자의 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사이비 종교 권유같이 들린다. 같은 노래를 좋아했던 그녀도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어쩌다 헤어졌어요? 아, 이건 좀 예민한 질문인가?"
"말해도 상관없어요. 그냥 연락이 끊겼어요. 오래 만난 것도 아니어서, 알고 있는 건 이름하고 전화번호뿐이었는데 연락이 안 되니 별 수 없는 거죠. 그녀에겐 그냥 그런 거였나 하고 포기했죠."
"그냥 그런 거라니?"
"그냥 난 걔한테 별 거 없는 상대였구나, 뭐 그런 거."
컴컴했던 국도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호텔의 불빛이 보였다. 사실 이 시간에 드라이브를 나온 건 적적함 때문이었다. 빛이 없어 어두운 제주도의 밤에 혼자 집에 있자니 외로움이 더 해진다. 이상하게 드라이브를 나오면 그녀에 관한 기억이 생생해졌다. 조수석을 바라보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하고 앉아 있을 것 같다.
여름 한 철, 같이 걸었던 바다, 그녀는 키가 큰 편이었고 오른쪽 눈 아래 눈물점, 꿈같은 말을 하는 편이었고, 뭐 그런 게 기억에 남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와 주고 받았던 말 같은 건 기억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만 들으면 알아채지 못 할지 모른다. 그저 시각적 이미지만 선명하게 남았다. 꽤나 쿨하게 헤어졌던 것 같은데 남아있는 내 감정이란 녀석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헤어진 거예요?"
"네."
"아쉬움이 남았네."
"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게 그런 거죠. 적당한 아쉬움이 남다가 이내 흐려지겠지 싶은 거."
"늙은이 같은 소리 하긴, 아직 젊어 보이는 데."
"그런가?"
"네, 쿨한 척하면 어린애들은 반할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그냥 찌질함을 숨기려는 것 같아."
"그런가 보네."
"또또, 쿨한 척한다. 그거 찌질한 거 라니까."
그녀는 문득 이런 말도 했다.
"여자가 남자를 갑자기 떠나는 이유를 알아요?"
"......갑자기 남자의 입냄새를 견딜 수 없어서?"
"뭐야 그건?"
그녀는 개가 말 하는 걸 보는 표정으로 날 봤다.
"트렌디한 잡지에서 본 거 같아서. '잘 만나던 여자가 당신을 떠나는 이유 10가지' 같이."
"그 뒤에 있는 페이지에 구취제거제 사진이랑 광고뭐 그런 거 나오지 않았어요?"
"......"
"하여간 잡지같은 건 돈들여서 겉멋만 들어갔어요. 본질 같은 건 전혀 관심 없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본질'이란 단어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그 단어 하나로 지금 이 공간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유가 뭔데요?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떠나는 이유. 개연성도 없이."
"몰라요, 그런 거."
"응?"
"어떻게 알겠어, 다 나름 사정이 있는 거지. 마음이 식어버린 걸 수도 있고, 어쩌면 빚쟁이한테 쫓겨서 도망간 걸 수도 있고. '화차'라는 영화 알죠? 저 그거 비슷한 상황 본 적 있어요."
어쩌라는 거야. 화차 같은 거 알게 뭐야.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한 내 표정을 봤는지 갸살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에요. 사랑했던 상대가 떠난다는 건. 이미 떠나버린 건데, 이유가 나한테 있을 지 어쩌면 다른 데 있을지 알 리가 없지. 삶에 개연성 같은 걸 따져 뭐해요? 일어날 법한게 아니라 이미 일어나 버렸는데. 그러니 중요한 건 떠나간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에요. 떠나간 사실을 인정하느냐 인정 못 하느냐, 잊느냐 못 잊느냐, 아쉬움이냐 그리움이냐 뭐 그런 결정이 남겨진 사람한테 남은 거지."
뭔가 부당하게 들렸다. 떠난 건 상대인데 남은 사람이 무언가 결정해야 한다니. 부당함? 어쩌면 불합리함일 수도 있겠다. 대화는 개연성 없게 거기서 끊겼다. 그대로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운전을 했다. 공백이 느껴지는 차내를 채우는 건 음악 소리 뿐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Belle and Sebastian의 'I Love My Car'. 분위기에 맞지 않는 평화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예전에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뭔가 상황은 어두운데 되게 밝은 노래가 나오는 그런 장면.
갑자기 떠나간 상대를 보내고 남겨진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쫓아갈까? 아니면 앉아서 그리워만 해야할까? 둘 다 싫어서 목적지가 없는 드라이브를 했다. 덕분에 국도에서 길 잃은 사람 하나 무사히 숙소로 귀가시켜주고. 이 정도면 남겨진 사람 중에 꽤나 괜찮은 편 아닐려나.
호텔 입구에 다 왔다. 이대로 보내는 게 좀 아쉬웠지만 더 끌만한 이유도 없었다. 어찌 보면 이쯤에서 헤어지는게 괜찮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괜히 시간을 끌면 어색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내릴 생각을 안 했다. 혼자 생각에 빠진 듯 턱에 엄지와 검지를 갖다 대고 '생각하는 남자' 포즈를 하고 있었다.
"안 내려요?"
여자는 여전히 생각에 골몰히 빠져있는 것 같았다. 생각하는 남자 자세를 풀고는 두 손으로 내 무릎을 짚고 고개를 올려다봤다. 차 안은 여전히 어두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 저를 그 여자라고 생각해봐요."
"네?"
"좀 더 온전한 이별로 하는 게 좋잖아요. 그래야 이런 밤중에 드라이브를 할 일도 없고. 제주도의 밤은 무섭지 않아요? 도로에 가로등도 별로 없고 가끔 귀신 나올 것 같잖아. 여기까지 태워준 보답이에요. 제대로 이별해드릴게. 아쉬움을 덜 수 있게."
이 여자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이 여자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라고 생각만 하지 말고 제 말대로 해봐요.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녀라고 생각해서 뭘 해요?"
"그냥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거 아녜요? 그걸 저한테 해봐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때 그 순간을 잠시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7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갈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즈음 만났던 그녀와는 만났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같이 제주도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전조 없이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 남은 건 그녀가 좋아했던 음악뿐이었다. 다음 달 나는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제주도에 내려왔다. 가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무렵, 그녀가 종종 떠오르는 날에는 한 밤에 바다를 보며 드라이브를 했다.
"그냥 떠오르는 말 아무거나 해도 돼요?"
"물론이죠."
그녀는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웃음이었다.
"나 곧 여기를 떠날 거야. 괜찮으면 너랑 같이 가고 싶어."
그녀는 응, 하고 끄덕이더니 말했다.
"매일매일 잠들 때까지 그냥 안아줄 수 있어?"
"그럴 수 없으면 이런 말도 안 했어."
"그럼 안아줘. 영원처럼."
"응."
그리고는 그녀를 안아줬다. 낯선 품이 내 품에 닿았다. '그래'라는 그녀의 속삭임이 귀에 닿았다. 뭐가 그렇다는 걸까.
품에서 떠난 그녀는 차에서 내린 뒤 손을 흔들고 호텔로 갔다. 어두운 차에서 나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환하게 비친 그녀의 얼굴에 눈물점이 있는 듯했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브레이크 타임에 가게 옆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H호텔 얘기를 했더니 카페 주인은 이런 얘기를 했다.
"거기 한 달 전에 문 닫았는데요? 불빛이 들어올 리가 없는데?"
"무슨 말이에요. 며칠 전에도 거기 묵은 사람 봤구먼."
카페 주인은 계속 얘기했다.
"아니에요, 지난주에 제가 갔을 때는 이미 철거를 시작하고 있었는데요, 뭘. 무슨 환영이라도 본 거 아니에요? 혹시 술 마시고 운전한 거 아니죠? 아무리 요즘 비수기라 섬에 사람 없다고 해도 음주운전은 안 돼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그녀의 얼굴은 흐릿하게 남아 기억이 안 났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어렴풋이 본 오른쪽 눈 아래의 눈물점과 마지막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뭘까 싶다가도 햇살이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괜찮은 만남이었으니까. 그게 귀신이든 사람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