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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Jul 08. 2024

탈락했어도 도전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가끔 보면 성교육 강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발견할 수 있다. 이번에는 서울 모처에서 그런 공고가 올라왔다. 도전해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서류 마감 당일이 돼서야 겨우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부랴부랴 서류를 써서 냈다.


서류를 내면서 보니 서류 발표가 내일, 강의 시연이 그다음 날이란다. 바쁘게 진행되는 전형일정을 보니 합격발표 이후 일정도 바쁘게 돌아갈 것 같다는 예상이 드네? 문제는 나도 바쁘다는 것이다. 당장 시연 준비할 시간도 없으니까 말이다.


서류를 얼레벌레 써서 겨우 제출해 두고 또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결격사유가 없으니 면접 보러 오라는 안내전화를 받게 되었다.


전화를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이 시연에 참여할 수 없겠다는 것을. 성교육에 있어서 최근의 나는 6개월 전의 나와는 관점도, 방향도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서류에는 성폭력 관련 교육에서 섹슈얼리티가 다뤄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아쉬움은 잔뜩 적어놓고, 실제로 성폭력과 섹슈얼리티가 함께 담긴 강의안은 만들어둔 게 없달까? 참, 나도 대책 없는 사람이지 싶다.


그래서 지금 내 노트북에는 최근 변화된 내 가치관이 담긴 ppt 강의자료가 없다. 당장 강의안을 만들고 싶어도 당장 오늘은 할 일과 일정이 있는 상태였다.


만약 내가 이 시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절박한 사람이었다면 달랐을까?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밤을 새워서라도 강의안을 새로 만드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요즘 나한테는 루틴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루틴을 깰 수는 없었다.


준비할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연에 도전하게 된 이유가 뭐였냐면 최근 성교육을 경험할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성장을 하려면 도전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교육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답답했다.


한편으로는 학교 강의에 대한 갈증도 있었다. 학교 강의를 못 가고 있으니까 감을 잃을 것 같은 막연한 걱정도 들었다. (체험관 강의, 기관 성교육은 하고 있지만) 겨우 1년 학교강의 못 간다고 해서 잃을 정도의 감이냐?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으려나? 강사는 강의를 나가야 강사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지난달에 학교 강의에 한 번 참여하긴 했다. 너무 좋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더 원하게 됐나?


이렇게 올라오는 여러 갈증과 답답함을 좀 뚫어보고 싶어서 시연에 도전했다. 사실 7~8월은 너무 바쁠 예정이라 합격이 되어도 스케줄이 가능할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도전했다. 답답함을 해소해 보려고.


소중한 토요일, 스케줄 어플에 기존의 일정을 지우고 시연준비와 시연을 채워 넣었다. 이동시간을 제외하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몇 시간뿐이더라.


6개월 전 내가 만들어 놓았던 강의안을 뒤적거리면서 구성을 짜고 배치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결말 부분이 여전히 아쉽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시연 결과를 공유받았다. 결과는 불합격. 와우.


불합격 이유에 대해서는 시연 당일날 피드백을 주셨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강의의 기승전결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 강의 참여자가 원하는 부분을 구조화해서 강의자료에 만들지 않은 부분, 강의자료에 사용하는 데이터를 강의참여자의 연령대와 일치시키지 않은 부분 등이다.


ppt 시연 자체가 처음이라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더 오래 노출하고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심사위원분들이 당연시하실 것이라 여기고 제쳐버린 부분 중에서 내 강의의 중요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조화와 비구조화 관련된 피드백은 특히 뼈아프다. 같은 수업을 여러 개 반에서 진행하더라도 각 반의 호응과 관심사에 따라 다른 수업이 되기도 하는 내 수업의 장점이자 단점이 비구조화이다.


강의와 상담을 동시에 하면서 강의가 점점 상담화 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모습이 강의안에 드러났던 것이다. 강의자료는 그냥 자료로만 기능하고 대부분은 말발로 해나간달까? 그래, 이런 걸 원하는 기관은 없겠지. 고치련다.


이렇게 시연을 해보면서 새로 배운 여러 지점이 있다. 그래서 불합격 시연에 갖다 바친 귀중한 토요일이 전혀 아깝지 않다.


아직 많이 부족한 강의안과 강의시연이었음에도 귀중한 시간 내서 들어주시고, 정성스럽게 피드백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토요일에도 출근해서 시연을 운영해 주신 운영진 샘들께 감사하다. 합격하지 못해서 함께 할 수 없으니 죄송하기까지 하다면 조금 오버하는 거겠지? 더 열심히 준비할 걸,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이게 지금 내 수준이지 싶은 생각도 든다. 받아들이련다.


2024년 1월에 숨고에 프로필을 열고 여러 과정을 거쳐 7월이 되었다. 성교육 현장에는 다양한 장면이 있음을 배우고 있고, 그 다양한 장면에 빠르게 작용할 수 있는 성교육 강사가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2024년 12월에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상상하기보다는 기대하는 쪽을 택해보고 싶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동료 강사들과 함께 자라며

내가 더 잘 쓰일 수 있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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