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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언덕 Jan 31. 2021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논어><학이>불환인지부기지환부지인야 <너는 특별하단다>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부기지 환부지인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논어><학이> 16장



<논어>의 16장에서는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말한다. <학이>편을 마무리하는 공자의 말이 무척 인상적이다. <학이>는 배움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모은 장이다. 배움의 기쁨과 즐거움에서 시작하여, 진정한 공부는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다. 그런 <학이>의 마지막에서 공자는 공부를 하는 태도, 공부의 목적에 대해 말한다. 공부를 끝없이 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라고 한다. <학이> 1장에서도 나왔던 말이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고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즐겁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군자라 할 수 있다. <논어><학이>1장



공부는 기쁘고 즐거운 것이지만, 그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배움의 길을 스스로를 위해 가라고 하였다. 나의 공부는 항상 절차탁마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거칠고 둔탁하며, 성과가 보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배움'이라는 <학이>편을 마무리하면서, <학이>의 1장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서운해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단도리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 말고, 도리어 자신이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고 말한다. 실로 탁월한 마무리가 아닐까. 읽는 이를 고민하게 만드는 마무리다.



<논어> <학이> 1-3장을 논하면서, 爲己之學(위기지학)과 爲人之學(위인지학)을 얘기한 적이 있다. 爲己之學(위기지학)은 나를 위한 학문이고, 爲人之學(위인지학)은 남을 위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己기는 '자기 자신'을 이를 때 쓰고, 人인은 보통 '다른 사람'을 말할 때 쓴다. 爲人之學(위인지학)이 다시 등장했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학문, 남을 위한 학문은 끝이 없다. 이러한 배움은 절대 충족되지 않으며 배움의 목적과 방향도 바뀌거나 사라지기 쉽다. 그래서 공자는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남을 알기 위해 노력하라고 강조한다.



'남을 알아주라'는 것은 무엇일까? 주자는 '다른 이들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라 해석했다. 남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야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위험한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남을 알아주라'는 것을 '다른 사람의 노력과 배움을 인정해주라'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남의 인정이 필요한 사람들, 혹은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성장하고 있는지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하고 있다."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는 한 마디. 그 한 마디를 의미한 것이 아닐까.



남을 이해해 주고 알아봐 주는 한 마디가 때로 절실할 때가 있다. 함께 배우는 과정에 있다면, 서로를 독려하며 응원하는 한 마디에 힘든 시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너는 특별하단다


맥스 루케이도 / 세르지오 마르티네즈  <너는 특별하단다>

<너는 특별하단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귀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알려주는 그림책이다. 나무인형 마을에 웸믹(나무 인형)들이 살고 있었다. 웸믹들은 서로에게 반짝이는 '별표'와 잿빛 '점표'를 붙이며 서로를 평가한다. 별표는 장점, 잘한 점, 칭찬이지만, 점표는 단점과 부족한 점을 의미한다. 펀치넬로는 별표를 받으려고 노력하지만 점프도 잘 못하고 말도 잘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라서 매번 점표만 많이 받는다. 자존감 하락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펀치넬로. 하지만 나무인형들을 만든 목수 '엘리' 아저씨를 찾아간 이후로 펀치넬로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펀치넬로는 점표와 별표, 다른 웸믹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고, 그의 몸에는 더 이상 그 어떤 표도 붙지 않게 된다. 비결은 무엇일까? 



비밀은 바로 엘리 아저씨의 말 한마디였다. 

바로 '너는 소중하고 특별하단다!'라는 말.



비유가 강한 그림책이다. 나무 인형과 목수 아저씨 '엘리'의 비유는 인간과 창조주를 연상시킨다. 창조주의 눈에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게 보이듯이, 나무 인형들을 만든 엘리 아저씨의 눈에는 인형들 모두가 귀하고 특별하게 보일 것이다. 스스로 하나하나 공을 들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외모나 단점, 부족한 점만 확대해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소중한 존재인데 말이다. '愛之欲其生 애지욕기생'이란 말이 있다. 유가에서 '사랑은 곧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다. 생명을 저버리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긴다. '생명' 그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부딪히고 경쟁하면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잊게 된다. 남들의 평가에 의지하게 되고,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뛰어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단점을 부추기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내가 살아있다는 것,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잊게 된다. 그럴 때가 누구나 있지 않을까? 나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을 때, 삶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이 바닥을 경험할 때 말이다.



그럴 때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그 생명력을 깨워준다. 바로 "너는 소중하고 특별해."라는 말이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말 한마디, 혹은 나를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간혹 종교를 가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교회를 다니는 어린이들은 확신으로 가득하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우리 아이들은 내가 종종 "사랑해"라고 말해주지만,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인지 매번 다시 듣고 싶어 한다. "정말?", "나 사랑하는 거 맞아?"하면서 위안을 구한다. "사랑해", "소중해", "특별해"라는 말은 그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 그래서 자주자주 해야 효과가 있는 말들이다. "미워해", "싫어해", "못났어"의 유효기간과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을 감안하여, 4배 더 자주 많이 해야 한다. 경쟁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일이 더 많지, 힘이 나게 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인정해 주는 말은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사랑'의 표현이다. 나는 그래서 공자가 마지막에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라고 말한 부분을 배움을 통해 서로를 알아봐 주라는 '사랑'의 의미로 읽고 싶다. 공자가 추구한 가치인 仁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배우는 거, 공부하는 거 힘들지? 그래도 잘하고 있어. 고생했어."

"회사에서 일하느라 힘들죠? 고마워요. 오늘도 고생했어요."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힘과 위안을 줄 수 있는 말인데 잊고 있었다. 공자의 글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런 말 한마디, 이런 한 사람 덕분에 배움의 길과 삶의 길이 더욱 즐거워진다는 것을.





걱정하자.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스승을 구하러 다닐 때, 나의 배움의 단계에 맞게 스승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제자가 씨앗인지, 새싹인지, 울창한 나무인지를 잘 알아보는 스승이 있다. 그들은 물을 줘야 하는지, 가지를 베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안다. 그리고 적절한 가르침을 내린다. 간혹 새싹인 학생에게 가위를 들이대거나 강한 바람을 쏘게 하여 제풀에 죽어버리는 경우를 보곤 한다. 매서운 가르침은 정말 견고한 나무들만이 견딜 수 있는데 말이다. 스승이라고 모두가 가르침에 탁월한 식견을 지닌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승도 실수하고 넘어지고 방황한다. 하지만 제자를 위해, 진정한 배움을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스승이라면 제자를 위한 적절한 한 마디를 제때에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잘하고 있다.", "고생이 많다.", "많이 늘었다."

누군가의 이 말 한마디에 얼마나 큰 위안을 받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배움의 길로 도전하게 되는가. 나는 그 한 마디의 가치를 안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이 말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 나이가 적든 많든 상관이 없다. 배움의 길이라면 그 길에서 길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는 경우가 태반일 테니 말이다. 스승이라면, 교사라면 그리고 부모라면 더욱 고민해야 한다. 적절한 한 마디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말이다.



걱정해보자.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 나의 새싹들에게 햇볕이 필요한지 물이 필요한지, 혹은 아직 싹이 트지 않은 상태인지 곰곰 점검해봐야겠다. 나의 스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생명력을 키워줄 말 한마디를 뿌려줘야겠다.



"너는 특별하단다. 너는 너의 길을 잘 가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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