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의 첫 단추, 최초의 동거인들을 모집하다
3개층, 방이 다섯개인 집의 월세는 당시 내가 받던 월급의 80 퍼센트에 달했다. 그랬기에 결정하는 데 2개월의 시간이 걸렸는데, 계약서를 서명하는 순간까지 사실 같이 살 사람이 정해지지 않았다. 2개월이라는 시간의 신중함이 무색하게 무모한 추진이었다. 그렇지만 저지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거나, 너무 늦으니까.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계약금을 넣었고, 이후로 본격적인 대책을 세우려고 할 때 좋은 소식이 생겼다.
이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때부터 내 푸념과 상상의 나래를 들어주던 경진이 먼저 합류를 결정한 것이다. 우물쭈물 대는 나와는 달리 결정이 사이다처럼 시원시원한 그를 나는 여러모로 존경했다. 해외여행이 대중화되기 전에 어떤 지원 없이 홀로 인도와 마다가스카르 등지로 떠났고, 10년 이상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일하고 살았다. 국내에서도 외국인 친구들이 많아 이들을 물심양면 도왔다. ‘힘들겠다’는 빈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손을 잡고 직접 장벽을 넘어가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병원에 같이 가주고, 일자리를 연결해주었다.
같은 업계에 일하면서 인연이 되었고, 게다가 처음엔 연희동 그다음엔 망원동, 다른 두 동네에서 동네 친구로서 만나기도 해 서로의 집을 자주 오가며 친해졌다. 취향이나 사고방식 등 여러모로 통하는 데가 많아서 우리가 같이 살면 딱이겠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는데 드디어 현실화되었다! 말이라는 씨는 열심히 뿌리고 볼 일이다.
온전히 말로만 된 건 아니다. 나의 은밀한 작전이 먹힌 면도 있었다. 이사를 간다면 사무실에서 너무 멀지 않은 해방촌 정도가 좋겠다고 한 경진의 희망사항을 참조해 후암동으로 동네를 결정하기도 했으니까. 잘하면, 아마도, 결국엔, 그가 합류를 할 것이란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고민에 고민을 더하는 동안 그가 원래 살던 집의 계약 종료일이 가까워져 온 것도 한몫했고.
"앤디가 갑자기 이사 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집을 찾고 있대. 한번 물어보는 게 어때?"
앤디도 경진이 도움을 준 친구 중에 하나였다. 경진만큼 친하진 않았지만 종종 보는 사이였다. 경진을 중심으로 한 망원동 동네 친구 모임에서 만났는데, 동네 마실을 같이 하다가 어쩌다 홋카이도까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알고 지낸 기간이 길진 않아 같이 살아도 괜찮을지 확신이 들진 않았다. 함께 홋카이도로 다녀온 경험을 리트머스지로 삼기로 했다. 이틀은 짧다면 짧지만 해외에서의 이틀간 꼬박 같이한 여행은 갈등이 생기기에 부족하지 않다. 걱정이 될만한 요소가 있었던가. 이틀 간의 기억을 하나씩 복기해보았다.
특기할 만한 트러블 보다는 내가 운전하는 동안 앤디가 주야장천 튼 K-발라드가 별안간 들리는 듯 했다. 정작 한국인인 나는 오글거려서 잘 안 듣는 곡들이었다. '아니, 이 노래를 어떻게 알지?' 싶은 그런 곡들도 더러 있었다. 한국어가 아직 부족해 가사를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앤디는 흥얼흥얼 잘도 따라 불렀다. 그에 반해 난 잘 모르는 언어로 된 노래를 그만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와 가까이 지내다 보면 나도 더욱 나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들었다.
음악 외에도 어떤 면에서는 한국에 대해 나나 경진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인인 우리 둘은 아무래도 애증의 감정이 섞여 한국 사회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앤디가 함께 한다면 우리 커뮤니티가 한국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다양한 거리감과 각도를 더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앤디가 함께 하면 정말 좋겠다!' 그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내 하우스메이트가 돼라!" 혹시나 부담을 줄까 봐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앤디, 곧 이사해야 한다고 들었어. 혹시 같이 살지 않을래?"
홋카이도 여행 제안에는 반사적으로 'Yes'라고 대답했던 그였기에, 짐짓 이번에도 '와이낫(Why Not)?! 너무 좋지!' 하고 덥석 물어주길 은근히 바랐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 지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다시 같이 사는 삶이 과연 괜찮을지 걱정했다. 한번 충분히 생각해보라고 쿨하게 통화를 끊었지만, 그가 거절한다면 어쩌지 하고 내심 초조했다. 며칠 후 그가 집을 한번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고, 다른 친구들도 같이 가보기로 했다.
“우와, 생각했던 것보다 집이 훨씬 크고 좋은데?!”
일단 집을 한번 보기로 한 후 다 함께 이사할 집에 처음으로 모인 날, 앤디가 결국 합류를 결정했다. 내친 김에 각자 누가 어느 방을 할 것인지도 논의해 결정하고, 인근 해방촌 오거리 루프탑 펍에 가서 맥주를 한잔씩 마시며 이 기념비 적인 날을 자축했다.
이렇게 커뮤니티의 밑바탕이 될 첫 세 명의 멤버가 성원이 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같이 살면 좋겠다 싶은 인연을 만나도 이사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참 드물기 때문이다. 이사 시기 뿐만 아니라, 인생의 국면이라든가 그 당시에 다니고 있는 회사의 위치라든가, 그런 요소들이 잘 맞기엔 쉽지 않다.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만남이었다. 우리 셋은 스타트업 창업자이거나 스타트업에 종사자하고 있었다. 어디 한 곳에 오롯하게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계인이기도 하다. 출신 국가가 우리를 설명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세계 곳곳에 그리운 사람들과 장소가 있는 디아스포라이기도 했다. 사람은 마그넷 같다. 인력과 장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용된다. 끼리끼리 놀고 유유상종 어울리지 않는가. 각각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도 상당한데, 이제는 그 힘이 모였으니… 다른 두 방에 들어올 친구들의 모집은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한국에 놀러오는 우리 세 사람의 친구들만 돌아가면서 받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다음엔 그 친구의 친구가 올 것이며, 그러다 보면 대강 비슷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끌어당겨와 지겠거니 낙관했다.
그렇게 커뮤니티에 관한 고민은 옆으로 치우고, 우선 거대한 집을 빨리 꾸며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늦은 밤까지 오늘의 집과 당근마켓을 번갈아가며 들락날락 거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혹시… 당근?” (이 자리를 빌려 두 플랫폼에 무한 감사를 표한다.)